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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697

김용택 봄비 2

김용맥 봄비 2. 봄날의 서정이 편하게 느껴진다. 봄비 2 /김용택 어제는 하루종일 쉬지도 않고 고운 봄비가 내리는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막 돋아나는 풀잎 끝에 가 닿는 빗방울들, 풀잎들은 하루종일 쉬지 않고 가만가만 파랗게 자라고 나는 당신의 살결같이 고운 빗줄기 곁을 조용조용 지나다녔습니다 이 세상에 맺힌 것들이 다 풀어지고 이 세상에 메마른 것들이 다 젖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는 내 마음이 환한 하루였습니다. 어제는 정말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운 당신이 하얀 맨발로 하루종일 지구 위를 가만가만 돌아다니고 내 마음에도 하루 종일 풀잎들이 소리도 없이 자랐답니다. 정말이지 어제는 옥색 실같이 가는 봄비가 하루 종일 가만가만 내린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 ❄출처 : 김용택 시집, 『참..

좋은시 2023.03.20

유안진 자격

유안진 자격. 당신은 연인이 될 자격을 갖추었습니까? 자격 /유안진 ​초가을 햇살웃음 잘 웃는 사람, 민들레 홀씨 바람 타듯이, 생활은 품앗이로 마지못해 이어져도, 날개옷을 훔치려 선녀를 기다리는 사람, ​슬픔 익는 지붕마다 흥건한 달빛 표정으로 열이레 밤하늘을 닮은 사람, ​모습 있는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알고, 그것들을 사랑하기에 너무 작은 자신을 슬퍼하는 사람, ​모든 목숨은 아무리 하찮아도 제게 알맞은 이름과 사연을 지니게 마련인줄 아는 사람, ​세상사 모두는 순리 아닌 게 없다고 믿는 사람, 몇 해 더 살아도 덜 살아도 결국에는 잃는 것 얻는 것에 별 차이 없는 줄을 아는 사람, 감동 받지 못하는 시 한 편도 희고 붉은피톨 섞인 눈물로 쓰인 줄을 아는 사람, ​커다란 것의 근원일수록 ..

좋은시 2023.03.18

나태주 너 가다가

나태주 너 가다가. 자신은 작아지는 것이 사랑법의 공식인가 너 가다가 /나태주 너 가다가 힘들거든 뒤를 보거라 조그만 내가 있을 것이다 너 가다가 다리 아프거든 뒤를 보거라 더 작아진 내가 있을 것이다 너 가다가 눈물 나거든 뒤를 보거라 조그만 점으로 내가 보일 것이다. 🍒 ❄출처 : 나태주 시집, 『너의 햇빛에 마음을 말린다』, 홍성사, 2020. 🍎 해설 나태주 시인이 자신의 딸(나민애 작가)에게 보내는 시다. 아버지는 언제나 딸이 빛나기 위해 자신은 한없이 작아질 수 있다는 시다.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자신이 한없이 작아질 수 있다. 애모라는 트로트에도 ‘그대 앞에만 서면 왜 나는 작아지는가’ 이런 구절이 나온다. 자신은 작아지는 것이 사랑법의 공식일지도 모른다. 너 가다가 눈물 나거..

좋은시 2023.03.14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살다보면 어떻게 가고 싶은 길만 가겠는가.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파여 있는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

좋은시 2023.03.13

노천명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노천명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가슴을 깎는 고독이 여과된 시.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노천명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 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짓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출처 : 노천명 시집, 『별을 쳐다보며』, 희망출판사, 1953. 🍎 해설 노천명 시인은 고독한 삶을 살다간 시인이다. 시인은 시골 속에 들어가 이름없는 여인으로 살 수 있다면 여왕보다 행복하겠다고 한다. 고독한 시인..

좋은시 2023.03.09

윤동주 바람이 불어

윤동주 바람이 불어. 윤동주 시인의 깊숙한 자아성찰의 시. 바람이 불어 /윤동주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 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꼬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우에 섰다. 강물이 자꼬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우에 섰다. 🍒 ❄출처 :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보물창고 , 2011. 🍎 해설 윤동주 시인은 자신의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아픔이 있다. 반어법이다. 시인은 반석과 언덕 위에 서서 일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고 방관자로 서 있는 자신을 조용히 자책하고 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좋은시 2023.03.08

이상국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이상국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내 새끼, 내 아내밖에 없다. 오늘은 집에 일찍 가자.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이상국 부엌에서 밥이 잦고 찌개가 끓는 동안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 나는 벌서듯 너무 밖으로만 돌았다 어떤 날은 일찍 돌아가는 게 세상에 지는 것 같아서 길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고 또 어떤 날은 상처를 감추거나 눈물자국을 안 보이려고 온몸에 어둠을 바르고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일찍 돌아가자 골목길 감나무에게 수고한다고 아는 체를 하고 언제나 바쁜 슈퍼 집 아저씨에게도 이사 온 사람처럼 인사를 하자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아내가 부엌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어둠이 세상 골고루 스며들면 불은 있는 대로 켜놓고 숟가락을 부딪치며 저녁을 먹자. 🍒 ❄출처 : 이상국 ..

좋은시 2023.03.07

나태주 전화를 걸고 있는 중

나태주 전화를 걸고 있는 중. 핸드폰으로 살며시 건네는 안부 인사. 그건 아름다운 일이다. 전화를 걸고 있는 중 /나태주 바람 부는 날이면 전화를 걸고 싶다 하늘 맑고 구름 높이 뜬 날이면 더욱 전화를 걸고 싶다 전화 가운데서도 핸드폰으로 멀리, 멀리 있는 사람에게 오래, 오래 잊고 살던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사람을 찾아내어 잘 있느냐고 잘 있었다고 잘 있으라고 잘 있을 것이라고 아마도 나는 오늘 바람이 되고 싶고 구름이 되고 싶은가보다 가볍고 가벼운 전화 음성이 되고 싶은가보다 나는 지금 자전거를 끌고 개울 길을 따라가면서 너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중이다. 🍒 ❄출처 : 나태주 시집, 『마음이 살짝 기운다』, 알에이치코리아, 2019. 🍎 해설 개울이 흘러가는 걸 보고 따라가면서, 자전거를 끌고 홀로 가..

좋은시 2023.02.27

조지훈 완화삼

조지훈 완화삼. 박목월의 명시 나그네를 탄생하게 만든 역사적인 시. 완화삼 - 목월에게 /조지훈 차운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 ❄출처 : 1946년 4월 [상아탑] 5호에 발표. 조지훈 시집, 『조지훈 선집』, 삼사재, 2020. 🍎 해설 완화삼(玩花衫): “꽃이 소매에 떨어지는 것을 즐겁게 감상한다”는 뜻. 시 본문에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라는 구절 등장. 이 시가 만들어진 데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1942년 봄. 박목월이 자신의 고향인 경주로 초면인 조지훈을 초대하였다..

좋은시 2023.02.25

정지용 유리창

정지용 유리창. 죽은 어린 자식에 대한 그리움을 형상화한 작품. 유리창 /정지용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흔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山)ㅅ새처럼 날아갔구나! 🍒 ❄출처 : 1930년 1월 『조선지광』 89호에 발표되었고 1935년에 간행된 『정지용시집』(시문학사)에 수록. 정지용 시집, 『유리창』, 민음사, 1994.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 🍎 해설 이 시는 자식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슬픔을 표현한 작품이다. 유리창에 감정을 ..

좋은시 2023.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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