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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697

송수권 새해 아침

송수권 좋은 시 새해 아침. 새해 아침에 새로운 다짐을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시. 새해 아침 /송수권 새해 아침은 불을 껐다 다시 켜듯이 그렇게 떨리는 가슴으로 오십시오 답답하고 화나고 두렵고 또 얼마나 허전하고 가난했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지난밤 제야의 종소리에 묻어둔 꿈도 아직 소원을 말해서는 아니 됩니다 외로웠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억울했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슬펐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얼마나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습니까? 그 위에 우레와 같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그 위에 침묵과 같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낡은 수첩을 새 수첩으로 갈며 떨리는 손으로 잊어야 할 슬픈 이름을 두 줄로 금긋듯 그렇게 당신은 아픈 추억..

좋은시 2023.01.01

이용악 슬픈 사람들끼리

이용악 좋은 시 슬픈 사람들끼리. 따스한 인정과 사람사는 냄새가 나는 시. 슬픈 사람들끼리 /이용악 다시 만나면 알아 못 볼 사람들끼리 비웃이 타는 데서 타래곱과 도루모기와 피 터진 닭의 볏 찌르르 타는 아스라한 연기 속에서 목이랑 껴안고 웃음으로 웃음으로 헤어져야 마음 편쿠나 슬픈 사람들끼리 🍒 ❄출처 : 1942년 작품, 이용악 시집, 『오랑캐꽃』, 아문각, 1947. 🍎 해설 *비웃: 청어 타래곱: 곱창 도루모기: 도루묵 일제 치하에서 우리 민족은 먹고 살기 위해서 북간도로 러시아 연해주로 유랑의 길을 떠나야 했다. 마지막 밤 그 슬픈 사람들끼리 종로 국일관이나 청진동 뒷골목 선술집에서 만났다. 내일이면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는 남남이다. 그러나 청어 타는 냄새, 곱창 타는 냄새, 도루묵 타는 냄새가..

좋은시 2022.12.31

박경리 눈먼 말

박경리 좋은 시 눈먼 말. 토지 박경리 작가의 자서전. 눈먼 말 /박경리 글 기둥 하나 잡고 내 반 평생 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이었네 아무도 무엇으로도 고삐를 풀어주지 않고 풀 수도 없었네 영광이라고도 하고 사명이라고도 했지만 진정 내게 그런 것 없었고 스치고 부딪치고 아프기만 했지 그래, 글 기둥 하나 붙들고 여기까지 왔네 🍒 ❄출처 : 박경리 시집, 『우리들의 시간』, 마로니에북스, 2013. 🍎 해설 *연자매: 연자방아. 둥글고 넓적한 돌판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세로로 세워서 이를 말이나 소 따위로 하여금 끌어 돌리게 하여 곡식을 찧는 방아. 일명 ‘연자방아’라고도 한다. 옛날 시골에서 곡식을 찧는 연자방아를 돌릴 때 그 돌이 너무 크고 무거워서 사람이 돌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이나 소가..

좋은시 2022.12.30

문삼석 네거리 빵집 앞

문삼석 좋은 시 네거리 빵집 앞. 어른들이 읽어도 재미있는 동시. 네거리 빵집 앞 /문삼석 네거리 빵집 앞 자동차들이 빵! -한 개만 달라고 졸라댑니다. 빵빵! -두 개만 달라고 졸라댑니다. 빵빵빵빵빵! -많이많이 달라고 졸라댑니다 🍒 ❄출처 : 문삼석 동시집, 『흑염소는 까매서 똥도 까맣다』, 섬아이, 2011. 🍎 해설 자동차 클락숀 소리의 빵빵과 아이들이 즐겨 먹는 빵의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동시다. 어른들이 읽어도 재미 있다. 50여 년 동안 묵묵히 오로지 동시라는 한 우물을 파 온 문삼석 시인에게 경의를 표한다. 동시는 우리나라의 미래의 일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훌륭한 문학 장르다. 네거리 빵집 앞 자동차들이 빵! -한 개만 달라고 졸라댑니다. 빵빵! -두 개만 달라고 졸라댑니다. 빵빵빵빵빵! -많..

좋은시 2022.12.29

조병화 늘, 혹은 때때로

조병화 좋은 시 늘 혹은 때때로. 여러분은 올 연말,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는가? 늘, 혹은 때때로 /조병화 늘, 혹은 때때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생기로운 일인가 늘, 혹은 때때로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카랑카랑 세상을 떠나는 시간들 속에서 늘, 혹은 때때로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인생다운 일인가 그로 인하여 적적히 비어 있는 이 인생을 가득히 채워가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가까이, 멀리, 때로는 아주 멀리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라도 끊임없이 생각나고 보고 싶고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지금,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명확한 확인인가 아, 그러한 네가 있다는 건 얼마나 따사로운 나의 저녁 노을인가. 🍒 ❄출처 : 조병화 시..

좋은시 2022.12.27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김광섭 좋은 시 성북동 비둘기.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과의 비교 분석. 성북동 비둘기 /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

좋은시 2022.12.26

김종길 성탄제

김종길 좋은 시 성탄제. 성탄절에 가족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해 주는 시. 성탄제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ㅡ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좋은시 2022.12.25

나태주 너를 아껴라

나태주 너를 아껴라. 나를 믿고 나를 아끼자. 너를 아껴라 /나태주 네가 가진 것을 아껴라 해와 달이 하나이듯이 세상에 너는 너 하나 너 이전에도 너는 없었고 너 이후에도 너는 없을 너는 너 하나 많은 꽃과 나무 가운데 똑같은 꽃과 나무는 하나도 없듯이 세상의 많은 사람 가운데 너는 너 하나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존재 세상의 그 무엇을 주고서도 너와 바꿀 수 없다 세상을 다 주고서도 너를 대신할 순 없다 세상의 어떤 값진 것으로도 너를 얻을 수는 없다 네가 가진 것을 아껴라 너의 결점과 너의 장점 너의 좌절과 너의 승리 너의 뜨거움과 그리움 너의 깨끗함을 아껴라 ❄출처 : 나태주 시집, 『너만 모르는 그리움』, 북로그컴퍼니, 2020. 🍎 해설 이 세상에 나는 하나 밖에 없다. 전무후무하다. 이 시는 우..

좋은시 2022.12.22

오광수 12월의 독백

오광수 12월의 독백. 마음을 어루 만져주는 송년시. 12월의 독백 /오광수 남은 달력 한 장이 작은 바람에도 팔랑거리는 세월인데 한 해를 채웠다는 가슴은 내놓을 게 없습니다. 욕심을 버리자고 다잡은 마음이었는데 손 하나는 펼치면서 뒤에 감춘 손은 꼭 쥐고 있는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비우면 채워지는 이치를 이젠 어렴풋이 알련만 한 치 앞도 모르는 숙맥이 되어 또 누굴 원망하며 미워합니다. 돌려보면 아쉬운 필름만이 허공에 돌고 다시 잡으려 손을 내밀어 봐도 기약의 언질도 받지 못한 채 빈손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해마다 이맘때쯤 텅 빈 가슴을 또 드러내어도 내년에는 더 나을 것 같은 마음이 드는데 어쩝니까? 🍒 ❄출처 : 오광수 시집, 『어제보다 아름다운 오늘』, 타임비, 2015. 🍎 해설 어느..

좋은시 2022.12.21

정호승 폭포 앞에서

정호승 좋은 시 폭포 앞에서. 이대로 떨어져 죽어도 좋다. 치열한 사랑시. 폭포 앞에서 /정호승 이대로 떨어져 죽어도 좋다 떨어져 산산이 흩어져도 좋다 흩어져서 다시 만나 울어도 좋다 울다가 끝내 흘러 사라져도 좋다 끝끈내 흐르지 않는 폭포 앞에서 내가 사랑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내가 포기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나는 이제 증오마저 사랑스럽다 소리 없이 떨어지는 폭포가 되어 눈물 없이 떨어지는 폭포가 되어 머무를 때는 언제나 떠나도 좋고 떠날 때는 언제나 머물러도 좋다 🍒 ❄출처 : 정호승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창비, 1997. 🍎 해설 사랑이 부박해져가는 시대이지만, 폭포 앞에서 이대로 떨어져 죽어도 좋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고 하는 강렬한 사랑의 의지는 우..

좋은시 2022.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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