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좋은 시 눈먼 말. 토지 박경리 작가의 자서전.
눈먼 말
/박경리
글 기둥 하나 잡고
내 반 평생
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이었네
아무도 무엇으로도
고삐를 풀어주지 않고
풀 수도 없었네
영광이라고도 하고
사명이라고도 했지만
진정 내게 그런 것 없었고
스치고 부딪치고
아프기만 했지
그래,
글 기둥 하나 붙들고
여기까지 왔네 🍒
❄출처 : 박경리 시집, 『우리들의 시간』, 마로니에북스, 2013.
🍎 해설
*연자매: 연자방아. 둥글고 넓적한 돌판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세로로 세워서 이를 말이나 소 따위로 하여금 끌어 돌리게 하여 곡식을 찧는 방아. 일명 ‘연자방아’라고도 한다.
옛날 시골에서 곡식을 찧는 연자방아를 돌릴 때 그 돌이 너무 크고 무거워서 사람이 돌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이나 소가 이것을 끌게 했다.그 때 사람들은 힘든 말이나 소가 뛰쳐 나가지 못하도록 눈을 가렸다. 안 보이면 말이나 소들은 묵묵히 연자방아를 돌리면서 평생을 살았다.
박경리 작가는 국민 대하소설 ‘토지’를 43세부터 쓰기 시작해서 69세까지 썼다. 작가는 자화상 같은 이 시에서 “글 기둥 하나 잡고/ 내 반 평생/ 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이었네”라고 처연한 고백을 한다. 창작의 고통이 오죽했으면 평생 연자방아 돌리는 눈먼 말이 자신이라고 했을까. 가슴이 뭉클해 진다.
펜대를 잡고 반 평생을 살아 온 나, 이제껏 글기둥 하나 잡고 연자방아를 돌리는 눈먼 말처럼 치열하게 살아 온 적이 있었던가?
앞으로 나는 무슨 기둥을 붙들고 눈먼 말처럼 살아갈 것인가?
글 기둥 하나 잡고
내 반 평생
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이었네
스치고 부딪치고
아프기만 했지
그래,
글 기둥 하나 붙들고
여기까지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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