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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블완 19

천양희 사람의 일

천양희 사람의 일.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사람의 일 /천양희고독 때문에 뼈아프게 살더라도사랑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고통 때문에 속 아프게 살더라도이별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사람을 다칩니다. 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사람과 만나면 우린 또 허기집니다. 언제까지 우린 사람의 일과싸워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 때문에 하루는 살 만하고사람 때문에 하루는 막막합니다.  하루를 사는 일이 사람의 일이라서우린 또 사람을 기다립니다.사람과 만나는 일, 그것 또한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 ❄출처 : 천양희 시집, 『오래된 골목』, 창비, 2003. 🍎 해설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우리는 매일 사람을 만나며 산다. 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 사람과 만나면 우린 또 허기진다. 사..

좋은시 2024.11.27

한강 효에게. 2002. 겨울

한강 효에게. 2002 겨울. 세 살된 아들을 보는 젊은 엄마의 시선.효에게. 2002. 겨울/한강바다가 나한테 오지 않았어.겁먹은 얼굴로아이가 말했다밀려오길래, 먼 데서부터밀려오길래우리를 덮고도계속 차오르기만 할 줄 알았나 보다 바다가 너한테 오지 않았니하지만 다시 밀려들기 시작할 땐다시 끝없을 것처럼 느껴지겠지내 다리를 끌어안고 다시 뒤로 숨겠지마치 내가그 어떤 것,바다로부터조차 널지켜줄 수 있는 것처럼 기침이 깊어먹은 것을 토해내며눈물을 흘리며엄마, 엄마를 부르던 것처럼마치 나에게그걸 멈춰줄 힘이 있는 듯이 하지만 곧너도 알게 되겠지내가 할 수 있는 일은기억하는 일뿐이란 걸저 번쩍이는 거대한 흐름과시간과 성장,집요하게 사라지고새로 태어나는 것들 앞에우리가 함께 있었다는 걸 색색의 알 같은 순간들을함..

좋은시 2024.11.26

고재종 파안

고재종 파안. 옛날의 농촌 주막과 같은 훈훈한 인정이 그립다.파안/고재종마을 주막에 나가서단돈 오천 원 내 놓으니소주 세 병에두부찌게 한 냄비 쭈그렁 노인들 다섯이그것 나눠 자시고모두들 볼그족족한 얼굴로 허허허허허허큰 대접 받았네그려 🍒 ❄출처 : 고재종 시집, 『날랜 사랑』, 창작과비평사, 1995. 🍎 해설*파안 破顔 : 얼굴이 찢어질 정도로 활짝 웃는 것.1995년 경의 농촌 주막 풍경이다. 당시 농사를 짓던 시인이 단돈 5,000원을 내놓는다.  두부찌개 한 냄비에 소주 세 병이면 노인들 몇몇이 그것을 실컷 나눠 마신다. 그리고는 모두들 불그족족한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허허허, 허허허, 큰 대접 받었네 그려!” 라며 몸 둘 바 모르게 칭찬을 했다. 참으로 소박한 모습이다. 단돈 5,000..

짧은 시 2024.11.25

한강 편지

한강 편지. 한강 작가의 실질적 데뷔 작품.편지/한강그동안 아픈데 없이 잘 지내셨는지궁금했습니다꽃 피고 지는 길그 길을 떠나겨울 한번 보내기가 이리 힘들어때 아닌 삼월 봄눈 퍼붓습니다겨우내내 지나온 열 끓는 세월얼어붙은 밤과 낮을 지나며한 평 아랫목의 눈물겨움잊지 못할 겁니다 누가 감히 말하는 거야 무슨 근거로 무슨 근거로 이 눈이 멈춘다고 멈추고만다고… 천지에, 퍼붓는 이… 폭설이, 보이지 않아? 휘어져 부러지는 솔가지들, … 퇴색한 저 암록빛이, 이, 바람가운데, 기댈 벽 하나 없는 가운데, 아아… 나아갈 길조차 묻혀버린 곳, 이곳 말이야… 그래 지낼 만하신지 아직도 삶은또아리튼 협곡인지 당신의 노래는아직도 허물리는 곤두박질인지당신을 보고난 밤이면 새도록 등이 시려워가슴 타는 꿈 속에어둠은 빛이 되고..

좋은시 2024.11.24

신달자 공연

신달자 공연. 인생은 연극이고 우리 인간은 모두 배우이다.공연/신달자막이 오르고 한 여자가 서 있다무대의 빛은 여자를 비추고 한동안 침묵이 흐른다빛을 바라보면서 여자는 드디어 입을 여는 것일까서서히 천천히 희미하게 몸이 너울처럼 흔들렸다모든 관객의 눈은 그 여자에게 쏠려 있다그 여자의 생 어디쯤일까봄 여름 가을 겨울이 비가 되었다가 눈이 되었다가갑자기 울부짖으며 흐느끼며 온몸이 거센 파도가 된다침묵과 울수짖음 그리고 느린 여자의 형상뿐막이 내렸다다 알아들었는데 사실 대사는 한마디도 없었다. 🍒 ❄출처 : 신달자 시집,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 민음사, 2023. 🍎 해설셰익스피어는 ”인생은 연극이고 우리 인간은 모두 무대 위에 선 배우이다. (All the world's a stage, An..

좋은시 2024.11.23

김소월 왕십리

김소월 왕십리. 김소월 명시 중 하나.왕십리/김소월비가 온다오누나오는 비는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온다고 하고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고 했지.가도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울랴거든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다고,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촉촉히 젖어서 늘어졌다네.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 🍒 ❄출처 : 김소월 지음, 오하근 엮음, 『정본 김소월 전집』, 집문당, 1995. 🍎 해설*삭망(朔望) :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날을 아울러 이르는 말. 옛날 왕십리는 서울 중심지에서 십 리쯤 떨어진 곳으로 비가 오면 질척거리기로 유명한 곳이다. 또한 왕십리는 ‘가도 가도 왕십리’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가고자 하지만 쉽사리..

좋은시 2024.11.22

유하 죽도 할머니의 오징어

유하 죽도 할머니의 오징어. 명필 한석봉이 자신의 어머니 떡 쓰는 솜씨에서 깨달음을 얻었듯이.죽도 할머니의 오징어/유하오징어는 낙지와 다르게뼈가 있는 연체동물인 것을죽도에 가서 알았다온갖 비린 것들이 살아 펄떡이는어스름의 해변가한결한결 오징어 회를 치는 할머니저토록 빠르게, 자로 잰 듯 썰 수 있을까옛날 떡장수 어머니와천하 명필의 부끄러움그렇듯 어둠 속 저 할머니의 손놀림이어찌 한갓 기술일 수 있겠는가안락한 의자 환한 조명 아래나의 시는 어떤가?오징어 회를 먹으며 오랜만에 내가, 내게 던지는뼈 있는 물음 한마디 🍒 ❄출처 : 유하 시집, 『무림일기』, 문헉과지성사, 2012. 🍎 해설죽도에서 할머니가 오징어회를 능숙하게 써는 모습을 보면서 기계처럼 시를 쓰는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을 표현하고 있다. ..

좋은시 2024.11.21

이영광 우물

이영광 우물. 우물이 우리를 올려다 봤다.우물/이영광우물은,동네 사람들 얼굴을 죄다 기억하고 있다 우물이 있던 자리우물이 있는 자리 나는 우물 밑에서 올려다보는 얼굴들을 죄다기억하고 있다 🍒 ❄출처 : 이영광 시집, 『나무는 간다』, 창비, 2013. 🍎 해설옛날 시골 동네에는 두레박으로 식수를 푸는 공동 우물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물을 긷기 위해 우물에 모여들었다. 우물가에서 사람들은 이웃집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교류를 했다. 우물은 사람들의 젖줄이었고, 마을의 눈동자였고. 마을 사람들의 역사였다.사람들은 물을 긷다가 문득 우물물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보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우물을 내려다본 게 아니었다. 우물이 우리를 올려다봤다. 우리의 상처와 고통과 치욕, 그리고 헌신과 ..

짧은 시 2024.11.20

안도현 꽃밭의 경계

안도현 꽃밭의 경계. 내 마음의 경계는?꽃밭의 경계 /안도현 꽃밭을 일구려고 괭이로 땅의 이마를 때리다가날 끝에 불꽃이 울던 저녁도 있었어라  꽃밭과 꽃밭 아닌 것의 경계로 삼으려고 돌을 주우러 다닐 때계곡이 나타나면 차를 세우고 공사장을 지나갈때면 목 빼고 기웃거리고 쓰러지는 남의 집 됫박만 한 주춧돌에도 눈독을 들였어라  물 댄 논에 로터리 치는 트랙터 지나갈 때 그 뒤를 겅중겅중 좇는 백로의 눈처럼 눈알을 희번덕거렸어라  꽃밭에 심을 것들을 궁리하는 일보다 꽃밭의 경계를 먼저 생각하고 돌의 크기와 모양새부터 가늠하는 내 심사가 한심하였어라  하지만 좋았어라  돌을 주워들 때의 행색이야 손바닥 붉은 장갑이지만 이 또한 꽃을 옮기는 일과도 같아서 나는 한동안 아득하기도 하였어라  그렇다면 한낱 돌덩이가..

좋은시 2024.11.19

김소월 가을 저녁에

김소월 가을 저녁에. 사랑은 인내의 미학.가을 저녁에/김소월물은 희고 길구나, 하늘 보다도. 구름은 붉구나, 해 보다도. 서럽다, 높아가는 긴 들끝에 나는 떠돌며 울며 생각한다, 그대를. 그늘 깊어 오르는 발 앞으로 끝없이 나아가는 길은 앞으로. 키높은 나무 아래로, 물마을은 성깃한 가지가지 새로 떠오른다. 그 누가 온다고 한 언약(言約)도 없건마는! 기다려 볼 사람도 없건마는! 나는 오히려 못물가를 싸고 떠돈다. 그 못물로는 놀이 잦을 때. 🍒 ❄출처 : 김소월 지음, 전문규 감수, 『진달래꽃』, 비타민북, 2023. 🍎 해설*물마을 : 강물가에 있는 마을 가을 저녁, 쓸쓸하고 외로운 때이다. 누군가 옆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일어나는 계절이다. 한 폭의 가을 수채화 속에서 한 사나이가 방황하고 있다...

좋은시 2024.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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