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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697

정희성 여기 타오르는 빛의 성전이

정희성 여기 타오르는 빛의 성전이. 유명한 서울대학교 찬가.여기 타오르는 빛의 성전이/정희성그 누가 길을 묻거든눈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이마가 시원한 봉우리기슭이마다 어린 예지의 서기가오랜 주라기(朱羅紀)의 지층을 씻어내린다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리듯이관악의 이마에 흐르는 보배로운 기름이여영원한 생명의 터전이여 겨레의 염원으로 기약한 이 날헤어졌던 이마를 비로소 마주대고여기 새로 땅을 열어한 얼의 슬기를 불 밝히니「진리는 나의 빛」이 불이 밝히는오 한 세대의 확고한 길을 보아라온갖 불의와 사악과어둠의 검은 손이 눈을 가릴 때에도그 어둠의 정수리를 가르며 빛나던 예지여역사의 갈피마다 슬기롭던아 우리 서울대학교 뼈 있는 자의 길을 보아라뼈 있는 자가 남기는 이념의 단단한 뼈를 보아라저마다 가슴 깊이 ..

좋은시 2023.10.16

장석남 입춘 부근

장석남 입춘 부근. 벼락치듯 나를 전율시킨 감동의 시 구절.입춘 부근 /장석남끓인 밥을 창가 식탁에 퍼다놓고 커튼을 내리고 달그락거리니 침침해진 벽 문득 다가서며 밥 먹는가, 앉아 쉬던 기러기들 쫓는다 오는 봄 꽃 밟을 일을 근심한다 발이 땅에 닿아야만 하니까 🍒 ❄출처 : 장석남 시집,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 창비, 2017. 🍎 해설벼락처럼 나를 전율시킨 감동의 시 구절이 있다. 장석남 시인의 ‘꽃 밟을 일을 근심한다’이다. 일부러 꽃을 밟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봄에 길가의 틈에 돋아나는 꽃과 풀을 자신도 모르게 밟을 수는 있다. 특히 보도블록 사이에서 얼굴을 내미는 작은 풀과 이름없는 꽃은 의식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밟고가는 일이 많다. 어디 입춘 부근뿐이겠는가? 걸어다니려면 발이 땅에 ..

좋은시 2023.10.14

나태주 가을 안부

나태주 가을 안부. 옛 친구가 갑자기 그리워지는 가을이다.안부를 물어볼까? 가을 안부 /나태주 골목길이 점점 환해지고 넓게 보인다 도시의 건물과 건물 사이가 점점 성글어진다 바람 탓일까 햇빛 탓일까 아니면 사람 탓일까 그래도 섭섭해하지 말자 우리는 오래된 벗 너 거기서 잘 있거라 나도 여기서 잘 있단다 🍒 ❄출처 : 나태주 시집, 『너와 함께라면 인생도 여행이다』, 열림원, 2019. 🍎 해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지만 동시에 고독의 계절이다. 누군가가 그리워진다. 옛 친구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가을에 좁은 골목길이 점점 환하게 점점 넓게 보이는건 그 길에서 옛 친구를 만나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친구가 보이지 않더라도 섭섭해 하지 말자. 우리는 오래된 벗. 부디 아프지마라. 나도 여기서 건강하게 지낼..

좋은시 2023.10.13

서정주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서정주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벼락치듯 나를 전율시킨 최고의 시 구절.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븬 가지에 바구니만 매여두고 내 소녀, 어디 갔느뇨 – 오일도(吳一島)/서정주아조 할 수 없이 되면 고향을 생각한다. 이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옛날의 모습들. 안개와 같이 스러진 것들의 형상을 불러일으킨다. 귓가에 와서 아스라이 속삭이고는, 스쳐가는 소리들. 머언 유명幽明에서처럼 그 소리는 들어오는 것이나, 한 마디도 그 뜻을 알 수 없다. 다만 느껴지는 건 너이들의 숨소리. 소녀여, 어디에들 안재安在하는지. 너이들의 호흡이 훈짐으로써 다시금 돌아오는 내 청춘을 느낄 따름인 것이다. 소녀여 뭐라고 내게 말하였든 것인가? 오히려 처음과 같은 ..

좋은시 2023.10.12

김남조 시계

김남조 시계. 인생의 애수가 짙게 깔려 있는 시.시계/김남조그대의 나이 90이라고 시계가 말한다 알고 있어, 내가 대답한다 그대는 90살이 되었어 시계가 또 한 번 말한다 알고 있다니까, 내가 다시 대답한다 시계가 나에게 묻는다 그대의 소망은 무엇인가 내가 대답한다 내면에서 꽃피는 자아와 최선을 다하는 분발이라고 그러나 잠시 후 나의 대답을 수정한다 사랑과 재물과 오래 사는 일이라고 시계는 즐겁게 한판 웃었다 그럴 테지 그럴 테지 그대는 속물 중의 속물이니 그쯤이 정답일 테지…… 시계는 쉬지 않고 저만치 가 있었다 🍒 ❄출처 : 김남조 시집, 『충만한 사랑』, 열화당, 2017. 🍎 해설사람과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한국 현대시의 지평을 넓힌 김남조 시인이 어제 2023년 10월 10일 별세했다(향년 9..

좋은시 2023.10.11

나희덕 소풍

나희덕 소풍. 자식이 앞으로 어려운 세상을 살면서 견딜 수 있는 힘은? 소풍 /나희덕 얘들아, 소풍가자. 해 지는 들판으로 나가 넓은 바위에 상을 차리자꾸나. 붉은 노을에 밥 말아 먹고 빈 밥그릇에 별도 달도 놀러오게 하자. 살면서 잊지 못할 몇 개의 밥상을 받았던 내가 이제는 그런 밥상을 너희에게 차려줄 때가 되었나보다. 오갈 데 없이 서러운 마음은 정육점에 들러 고기 한 근을 사고 그걸 싸서 입에 넣어줄 채소도 뜯어왔단다. 한 잎 한 잎 뜯을 때마다 비명처럼 흰 진액이 배어 나왔지. 그리고 이 포도주가 왜 이리 붉은지 아니? 그건 대지가 흘린 땀으로 바닷물이 짠 것처럼 엄마가 흘린 피를 한 방울 씩 모은 거란다. 그러니 얘들아, 꼭꼭 씹어 삼켜라. 그게 엄마의 안창살이라는 걸 몰라도 좋으니, 오늘은 ..

좋은시 2023.10.10

윤보영 그리움을 말한다

윤보영 그리움을 말한다.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그리워하자. 그리움을 말한다 /윤보영 그리움 한 자락 담고 사는 것은 그 만큼 삶이 넉넉하다는 뜻이다 그립거든 그리운 대로 받아들이자. 마주 보고 있는 산도 그리울 때는 나뭇잎을 날려 그립다 말을 하고 하늘도 그리우면 비를 쏟는다. 우리는 사랑을 해야 할 사람이다 그립거든 그리운 대로 그리워 하고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받아들이자 가슴에 담긴 그리움도 아픔이 만든 사랑이다 가슴에 담고 있는 그리움을 지우려 하지말자 지운 만큼 지워진 상처가 살아나고 상처에는 아픈 바람만 더 아프게 분다. 그리울 때는 무얼 해도 그리울 때는 하던 일을 잠시 내려놓고 그리워하자. 가벼운 마음으로 사는 맛을 느낄 수 있게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그리워하자.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길이..

좋은시 2023.10.07

김재진 국화 앞에서

김재진 국화 앞에서. 우리의 삶을 반추하게 만드는 꽃.국화 앞에서 /김재진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사람들은 모른다 귀밑에 아직 솜털 보송보송하거나 인생을 살았어도 헛 살아버린 마음에 낀 비계 덜어내지 못한 사람들은 모른다 사람이라도 다 같은 사람이 아니듯 꽃이라도 다 같은 꽃은 아니다 눈부신 젊음 지나 한참을 더 걸어가야 만날 수 있는 꽃 국화는 드러나는 꽃이 아니라 숨어 있는 꽃이다 느끼는 꽃이 아니라 생각하는 꽃이다 꺽고 싶은 꽃이 아니라 생각하는 꽃이다 가만히 바라보는 꽃이다 살아 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은 가을날 국화 앞에 서 보면 안다 산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굴욕을 필요로 하는가를. 어쩌면 삶이란 하루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견디는 것인지 모른다. 어디까지 끌고 가야할지 모를 ..

좋은시 2023.10.06

신경림 동해바다 - 후포에서

신경림 동해바다 - 후포에서.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이는 동해바다처럼.동해바다 -후포에서/신경림친구가 원수보다 미워지는 날이 많다 티끌만한 잘못이 멧방석만하게 동산만하게 커보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남에게는 엄격해지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보다 돌처럼 잦아지고 굳어지나보다 멀리 동해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다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른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스스로는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 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 🍒 ❄출처 : 신경림 기행시집, 『길』, 창비, 2000. 🍎 해설* 후포는 경북 울진 아래에 있는 작은 어항이다. 이 시는 시인이 오랜 민요기행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과 찾은 마을, 그리고 바라보고 지나친 바다와 산을 툭..

좋은시 2023.10.05

나태주 가을 햇살 앞에

나태주 가을 햇살 앞에. 겸손하고 부드러운 관용의 마음을 느껴보게 하는 가을시.가을 햇살 앞에/나태주 고개를 숙여라 더욱 고개를 숙여라 손아귀에 쥐고 있는 것 있다면 그것부터 놓아라. 스스로 편안해져라 너 자신을 쉬게 하고 위로하고 기꺼이 용서하라. 지난 여름은 또다시 싸움판 힘든 날들이었다. 이제 방안 깊숙이 밀고 들어오는 햇살 우리 마음도 따라서 고요해질 때 가을은 가을 햇살은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고 부드러움을 요구한다. 🍒 ❄출처 : 나태주 시집, 『너와 함께라면 인생도 여행이다』, 열림원, 2019. 🍎 해설가을은 추수의 계절이다. 지난 여름이 유난히 뜨거웠던 것은 곡식과 과일을 더 맛있게 익게 하기 위해서였다. 가을은 자신의 모든 것들을 온전히 내려놓고 겸허하게 돌아보는 마음을 갖는 계절이다...

좋은시 2023.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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