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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697

박노해 가을볕이 너무 좋아

박노해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을볕에 내 젖은 마음도 말린다.가을볕이 너무 좋아/박노해가을볕이 너무 좋아 고추를 따서 말린다 흙마당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는 물기를 여의며 투명한 속을 비추고 높푸른 하늘에 내 걸린 흰 빨래가 바람에 몸 흔들며 눈부시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만히 나를 말린다 내 슬픔을, 상처난 욕망을, 투명하게 비춰오는 살아온 날들을 🍒 ❄출처 : 박노해 시인의 숨고르기, 나눔문화, https://www.nanum.com/site/poet_sum/4603774 🍎 해설붉게 익은 고추를 따서 마당에 널어놓는다. 뜨거운 가을볕 아래 고추는 노란 씨가 보일 정도로 투명하다. 바람에 흔들리는 흰 빨래가 눈부시다. 투명한 고추, 흰 빨래를 보며 자신을 돌아본다. 한때의 슬픔과 상처 난 욕망이 보인다..

좋은시 2023.09.09

이원규 단풍의 이유

이원규 단풍의 이유. 이 가을 한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합니다. 단풍의 이유 /이원규 이 가을에 한 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하다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행하다 단풍잎들 일제히 입을 앙다문 채 사색이 되지만 불행하거나 불쌍하지 않다 단 한 번이라도 타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너는 붉나무로 나는 단풍으로 온몸이 달아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사랑도 그와 같아서 무작정 불을 지르고 볼 일이다 폭설이 내려 온몸이 얼고 얼다가 축축이 젖을 때까지 합장의 뼈마디에 번쩍 혼불이 일 때까지 🍒 ❄출처 : 이원규 시집, 『옛 애인의 집』, 솔, 2003. 🍎 해설 시인은 " 이 가을 한 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하다"고 노래했다.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행하다’면서 단풍잎이 비록 입을 ..

좋은시 2023.09.08

정호승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정호승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이별의 한과 삶의 외로움 그리고 그리움을 조용히 응원하는 시.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정호승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사람을 멀리 하고 길을 걷는다 살아갈수록 외로와진다는 사람들의 말이 더욱 외로와 외롭고 마음 쓰라리게 걸어가는 들길에 서서 타오르는 들불을 지키는 일은 언제나 고독하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면 어둠 속에서 그의 등불이 꺼지고 가랑잎 위에는 가랑비가 내린다 🍒 ❄출처 : 정호승 시집, 『수선화에게』, 비채, 2015. 🍎 해설사랑에는 기쁨이 있지만 이별의 한이 있기 마련이다. 이 시는 첫 연에서 승부가 났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사람을 멀리 하고 길을 걷는다.’ 이별한 그 사람을 잊지 못하여 다른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아예..

좋은시 2023.09.06

김사인 바짝 붙어서다

김사인 바짝 붙어서다. 긍휼의 시 세계를 개척한 한국시단의 기념비적인 작품..바짝 붙어서다/김사인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빼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벽에 바짝 붙어 선다 유일한 혈육인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저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밤에 그 방에 켜질 헌 삼성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싱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서있을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메인다. 방 한 구석 힘주어 꼭 짜놓은 걸레를 생각하면... 🍒 ❄출처 : 김사인 시..

좋은시 2023.09.03

이채 가을엔 누구와 차 한잔의 그리움을 마시고 싶다

이채 가을엔 누구와 차 한잔의 그리움을 마시고 싶다. 봄, 여름내 헤매던 그리움들이 익어 가는 가을....가을엔 누구와 차 한잔의 그리움을 마시고 싶다 /이채햇살은 다정해도 바람은 왠지 쓸쓸한 탓일까 가을엔, 낙엽 지는 가을엔 누구와 차 한잔의 그리움을 마시고 싶다 가을바람처럼 만나 스산한 이 계절을 걷다가 돌계단이 예쁜 한적한 찻집에서 만추의 사색에 젖어들고 싶다 사랑하는 연인이라면 빨간 단풍잎처럼 만나도 좋겠지 은은한 가을 향을 마시며 깊어가는 가슴을 고백해도 좋겠지 굳이 사랑이 아니라도 괜찮아 가을엔, 낙엽 지는 가을엔 노을빛 고운 들창가에 기대어 누구와 차 한잔의 그리움을 마시고 싶다 🍒 ❄출처 : 이채 시집, 『마음이 아름다우니 세상이 아름다워라』,행복에너지,2014. 🍎 해설그 지긋지긋하던 폭..

좋은시 2023.09.02

김용택 그랬다지요

김용택 그랬다지요. 완벽하지 못한 삶을 응원하는시.그랬다지요/김용택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 게 이게 아닌데 이러는 동안 어느새 봄이 와서 꽃은 피어나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러는 동안 봄이 가며 꽃이 집니다 그러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그랬다지요 🍒 ❄출처 : 김용택 시집, 『그 여자네 집』, 창비, 1998. 🍎 해설 많은 사람들이 “사는 게 이게 아닌데”라는 탄식을 하면서 아침을 맞는다. 저녁에 집에 돌아 와서도 비슷한 탄식을 한다. ‘이게 아닌데’ 어리둥절한 사이에 인생의 봄날은 왔고, ‘이게 아닌데’ 방황하는 사이에 인생의 봄날은 갔다. 이 시는 ‘이게 아닌데’의 삶을 응원한다. 그 이유는 완벽하지 못한 삶,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의 삶이기 때문이다. 나만 그런가, 너도 그렇..

좋은시 2023.09.01

이남일 짝사랑

이남일 짝사랑. tvN 드라마 '시를 잊은 그대에게' 제1화로 소개된 시. 짝사랑 /이남일 어쩌다 내 이름을 불러 준 그 목소리를 나는 문득 사랑하였다. 그 몸짓 하나에 들뜬 꿈 속 더딘 밤을 새우고 그 미소만으로 환상의 미래를 떠돌다 그 향기가 내 곁을 스치며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만 햇살처럼 부서지고 말았다. 🍒 ❄출처 : 이남일 시집, 『고향이 그리운 건』, 시와사람, 2003. 🍎 해설 짝사랑 그 시절은 정말 아름다웠던 시절이다. 누구에게나 짝사랑에 대한 기억이 있다. 쿵하고 무엇이 내려앉는 소리가 난다. 무엇이 부서지는 듯하다. 이 시는 ‘나는 그만 햇살처럼 부서지고 말았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는 짝사랑에 관한 그 어떤 순박한 시적 고뇌가 숨어 있다. 그래서 좋다. 이 시는 tv..

좋은시 2023.08.31

장만영 달· 포도· 잎사귀

장만영 달· 포도· 잎사귀. 디자인과 이미지가 뚜렷한 유명한 서정시. 달· 포도· 잎사귀 /장만영 순이 벌레 우는 고풍한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동해 바다 물처럼 푸른 가을 밤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 포도 덩굴 밑에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구나. 🍒 ❄출처 : 장만영, 『장만영 전집』, 국학자료원, 2014. 🍎 해설 장만영 시인(1914~1975)은 전원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한 우수 서정시인이다. 이 시는 시인의 대표작 중 하나다. 마치 한 폭의 움직이는 그림을 보는 듯하다. 디자인과 이미지가 뚜렷하다. 고풍스러운 뜰, 밀물처럼 밀려와 앉아있는 달빛, 포도는 그 달빛을 머..

좋은시 2023.08.28

나태주 사랑은 언제나 서툴다

나태주 사랑은 언제나 서툴다. 서툰 것만이 사랑이라고 한다. 사랑은 언제나 서툴다 /나태주 서툴지 않은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어제 보고 오늘 보아도 서툴고 새로운 너의 얼굴 낯설지 않은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금방 듣고 또 들어도 낯설고 새로운 너의 목소리 어디서 이 사람을 보았던가...... 이 목소리 들었던가...... 서툰 것만이 사랑이다 낯선 것만이 사랑이다 오늘도 너는 내 앞에서 다시 한 번 태어나고 오늘도 나는 네 앞에서 다시 한 번 죽는다. 🍒 ❄출처 : 나태주 시집,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지혜, 2020. 🍎 해설 볼 때마다 새롭고 만날 때마다 반가운 사람. 그 사람만 생각하면 두근거리고 설레는 마음이 있다면, 늘 보는 얼굴이라 해도 처음 본 듯 낯설고 서툴러진다면 그 사람을..

좋은시 2023.08.26

김지하 절, 그 언저리

김지하 절, 그 언저리. 궁극적인 시대정신을 갈구한다. 절, 그 언저리 /김지하 절 그 언저리 무언가 내 삶이 있다 쓸쓸한 익살 달마達摩 안에 한매寒梅의 외로운 예언 앞에 바람의 항구 서너 촉 풍란風蘭 곁에도 있다 맨끝엔 반드시 세 거룩한 빛과 일곱별 풍류가 살풋 숨어 있다 깊숙이 빛 우러러 절하며. 🍒 ❄출처 : 김지하 시집, 『절, 그 언저리』, 창비, 2003. 🍎 해설 저항시인 김지하는 2000년대 초, 통도사로 백양사로 또 이름없는 절로. 스님을 만나고 한매(寒梅)도 만났다. 그리고 절 언저리 어느 곳에 그가 남겨놓은 삶들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고. 사상탐험을 했다. 절을 돌며 쓴 시집이 ‘절, 그 언저리’였다. 이 시집은 공초문학상 2003년 수상작품이고 이 시는 그 시집의 표제시다. 이 시..

좋은시 2023.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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