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이원규 단풍의 이유

무명시인M 2023. 9. 8.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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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규 단풍의 이유.

이원규 단풍의 이유. 이 가을 한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합니다.

단풍의 이유

/이원규

이 가을에 한 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하다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행하다
 
단풍잎들 일제히
입을 앙다문 채 사색이 되지만
불행하거나 불쌍하지 않다
 
단 한 번이라도
타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너는 붉나무로
나는 단풍으로
온몸이 달아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사랑도 그와 같아서
무작정 불을 지르고 볼 일이다
 
폭설이 내려 온몸이 얼고
얼다가 축축이 젖을 때까지
합장의 뼈마디에 번쩍 혼불이 일 때까지 🍒
 
❄출처 : 이원규 시집, 『옛 애인의 집』, 솔, 2003.
 

🍎 해설

시인은 " 이 가을 한 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하다"고 노래했다.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행하다’면서 단풍잎이 비록 입을 앙다문 채 사색이 되었지만 ‘단 한 번이라도/ 타오를 줄 알기에’ 불행·불쌍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합장의 뼈마디에 번쩍 혼불이 일 때까지’ 사랑해보라고, ‘한 번이라도/ 타오르라’고 권고한다.
 
여러분, 이번 여름에 폭염으로 고생 많으셨지요. 이 가을 단풍 구경도 좋겠지만 차가운 마음을 데울 뜨거운 사랑으로 한 번이라도 불타 오르시기 바랍니다.
 

🌹이원규 시인

1962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났다. 시인으로 지내던 1998년 봄 서울역에서 전라선 밤기차에 올랐다. 구례구역에 내린 뒤 지리산에 입산한 지 23년째, 산중 빈집을 떠돌며 이사만 여덟 번을 했다. 잠시 집을 비우고 ‘4대강을 살리자’며 먼길을 나선 지 얼마 뒤, 3만 리 순례의 후유증으로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지독한 고통으로 찾은 병원에서 결핵성 늑막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홀연 지리산으로 되돌아간 그가 어느 날부터 안개와 구름 속의 야생화를 담기 시작했다. 비바람이 불고 먹구름이 밀려오면 날마다 산에 올랐다. 날마다 수백 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모두 지우다보니 7년 동안 단 3장만을 남기기도 했다. 몽환적인 사진 한 장을 위해 야영을 하고 우중의 산정에서 한 송이 꽃 앞에 쭈그려 앉아 아홉 시간을 기다렸고 비바람 몰아치는 산길에서 구르기도 다반사였다. 마침내 도처에 숨었던 야생화들이 환한 얼굴을 드러냈고, 빛이 없는 산속에서 별들이 찬란하게 쏟아져 내렸다. 비로소 족필(足筆)의 시인이 된 그가 이 책에 지극히 사랑하는 산과 꽃과 별의 자취를 남겼다. 오늘도 그는 세상도처의 꽃들과 벗하며 지리산 품에 안겨 산다.
 
1984년 [월간문학], 1989년 [실천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시집 『돌아보면 그가 있다』, 『옛 애인의 집』 등과 산문집 『길을 지우며 길을 걷다』, 시사진집 『그대 불면의 눈꺼풀이여』 등을 펴냈다. 제16회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하였다. 오래전 지리산으로 들어가 시를 쓰고 사진을 찍으며 생의 한철을 잘 보내고 있다.
 

自序(저자 서문)
이원규

 
지리산에 얼굴을 묻고 생의 한철 잘 놀았다.
詩는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 했던가.
6년 만에 남은 것은 이것뿐이다.
그동안 원 없이 걸었다.
낙동강 1,300리, 지리산 850리 도보순례를 하고
백두대간과 새만금을 들락거렸다.
그마저 지겨우면 오토바이를 타고 꽃의 속도,
단풍의 속도로 전국을 일주했다.
돌아보면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간지옥이자
백척간두 진일보였다.
고맙고 고마운 사람들,
나는 여전히 안면몰수, 후안무치의 산짐승이다.
❄출처 : 이원규 시집, 『옛 애인의 집』, 솔, 2003, 출판사의 작가소개 및 저자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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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에 한 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하다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행하다
 
단풍잎들 일제히
입을 앙다문 채 사색이 되지만
불행하거나 불쌍하지 않다
 
단 한 번이라도
타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사랑도 그와 같아서
무작정 불을 지르고 볼 일이다
 
폭설이 내려 온몸이 얼고
얼다가 축축이 젖을 때까지
합장의 뼈마디에 번쩍 혼불이 일 때까지

이 가을에 한 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하다
단풍잎들 불행하거나 불쌍하지 않다
단 한 번이라도 타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사랑도 그와 같아서 무작정 불을 지르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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