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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697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자의 외간 남자가 되어. 사내들의 일탈의 충동이란?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김사인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려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 눈곱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쫒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고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년 놓아 보내고 ..

좋은시 2023.11.25

양애경 사랑

양애경 사랑.이별하는 순간 사랑이 끝난 건 아니다.사랑/양애경둘이 같이 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문득 정신 차려 보니 혼자 걷고 있습니다 어느 골목에서 다시 만나지겠지 앞으로 더 걷다가 갈증이 나서 목을 축일 만한 가게라도 만나지겠지 앞으로 더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참 많이도 왔습니다 인연이 끝나고 계속 앞으로 걸어간다고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온 길을 되짚어 걸어가야 합니다 많이 왔을수록 혼자 돌아가는 길이 멉니다. 🍒 ❄출처 : 양애경 시집, 『불이 있는 몇 개의 풍경』, 문학동네, 2021. 🍎 해설이별하는 순간 사랑의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별 또한 사랑의 일부다. 헤어진다고 해서, 이 길을 혼자 걷는다고 해서 사랑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혼자 걷고..

좋은시 2023.11.22

한강 괜찮아

한강 괜찮아. 살다보면 까닭없는 울음이 쏟아질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괜찮아/한강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아파서도 아니고아무 이유도 없이해질녘부터 밤까지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 버릴까봐나는 두 팔로 껴안고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문득 말해봤다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괜찮아. 괜찮아. 이젠 괜찮아.  거짓말처럼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우연의 일치였겠지만며칠 뒤부터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서야그렇게 알았다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

좋은시 2023.11.18

노자영 장미

노자영 장미. 사랑에 예쁜 장미만 있었겠는가?장미/노자영장미가 곱다고 꺾어보니까 꽃포기마다 가시입니다 사랑이 좋다고 따라가 보니까 그 사랑 속에는 눈물이 있어요...... 그러나 사람은 모든 사람은 가시의 장미를 꺾지 못해서 그 눈물 사랑을 얻지 못해서 섧다고 섧다고 부르는구려 🍒 ❄출처 : 노자영 제2시집, 『내 혼이 불탈 때』, 1928. / 『노자영 시집』, 토지출판, 2018. 🍎 해설사랑을 되돌아 본다. 예쁜 장미만 있었겠는가? 남들은 모르는 수 많은 가시가 내 몸에, 내 가슴에 박혀 있다. 사랑을 되돌아 본다. 사랑 속에는 남들이 모르는 수 많은 고통과 눈물이 따라 온다. 그러나 이게 사랑의 궤적이고 사랑의 모습이니 어찌할 것인가? 사랑의 가시에 깊이 찔리지 않기 위하여 사랑을 하지 않을 것인..

좋은시 2023.11.17

이기철 사람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다

이기철 사람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다. 당신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다. 사람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다 /이기철 달걀이 아직 따뜻할 동안만이라도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사는 세상엔 때로 살구꽃같은 만남도 있고 단풍잎 같은 이별도 있다. 지붕이 기다린 것만큼 너는 기다려 보았느냐 사람 하나 죽으면 하늘에 별 하나 더 뜬다고 믿는 사람들의 동네에 나는 새로 사 온 호미로 박꽃 한 포기 심겠다. 사람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다. 내 아는 사람이여 햇볕이 데워 놓은 이 세상에 하루만이라도 더 아름답게 머물다 가라. 🍒 ❄출처 : 이기철 시집, 『저 꽃이 지는데 왜 내가 아픈지』, 문예바다, 2021. 🍎 해설 세상은 사람이 있어 아름답다. 살구꽃처럼 만나 단풍잎처럼 헤어지더라도 사람사이에 사랑이 있기에 세..

좋은시 2023.11.14

김남조 가고 오지 않는 사람

김남조 가고 오지 않는 사람. 두 사람간의 사랑 무게의 저울이 좀 기울어지면 어떤가. 가고 오지 않는 사람 /김남조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려 줍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부끄러워 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 없습니다. 요행이 그 능력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많이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 됩시다 🍒 ❄출처 : 김남조 시집, 『김남조 시전집』, 국학자료원, 2005. 🍎 해설 사람과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한국 현대시의 지평을 넓힌 김남조 시인이 금년 10월에 별세했다(향년 96세). 여성 시단의 최고 원로이자, 1,000여 편의 시를 쓰며 펜을 놓지 않았던 영원한 현역. 시인은 ‘사랑’의 가치를 역설하는 작품으로 차갑게 식..

좋은시 2023.11.13

박치성 봄이에게

박치성 봄이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아름다운 시.봄이에게/박치성민들레가 어디서든 잘 자랄 수 있는 건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는 바람에 기꺼이 몸을 실을 수 있는 용기가 있기 때문이겠지 어디서든 예쁜 민들레를 피어낼 수 있는 건 좋은 땅에 닿을거라는 희망을 품었고 바람에서의 여행도 즐길수 있는 긍정을 가졌기 때문일거야 아직은 작은 씨앗이기에 그리 조급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리 불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넌 머지않아 예쁜 꽃이 될테니까 🍒 ❄출처 : 박치성 시집, 『널 만난 후, 봄』, 부크크(bookk), 2016. 🍎 해설희망과 용기를 주는 아름다운 시다. 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날리고 날리어 어느 낯선 땅에 이르게 될지라도, 긍정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날 것이라는 확신을 ..

좋은시 2023.11.09

정끝별 사막거북

정끝별 사막거북. 사막거북의 생존전략에서 배운다. 사막거북 /정끝별 사막에서 물을 잃는 건 치명적인 일이다 가물에 콩 나듯 사막에서 만나는 풀이나 선인장에게 병아리 눈물만큼의 물을 얻어 몸속에 모았다가 위험에 빠지면 그마저도 다 버린다 살기 위해 배수진을 치는 것이다 나도 슬픔에 빠지면 몸속에 모았던 물을 다 비워낸다 쏟아내고서야 살아남았던 진화의 습관이다 어떤 것은 버렸을 때만 가질 수 있고 어떤 것은 비워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쏟아내고서야 단단해지는 것들의 다른 이름은? 돌처럼 단단해진 두 발을 본 적이 있다 피딱지가 엉겨 있었다 어느 거리였을까 어느 밥벌이 전쟁터였을까 🍒 ❄출처 : 정끝별 시집, 『모래는 뭐래』, 창비, 2023. 🍎 해설 사막거북은 극한 상황에 대비해 몸속에 물을 저장한다. 하..

좋은시 2023.11.08

홍수희 그늘만들기

홍수희 그늘만들기. 친구밖에 없다. 서로의 그늘 아래 쉬어 가자.그늘만들기/홍수희 8월의 땡볕 아래에 서면 내가 가진 그늘이 너무 작았네 손바닥 하나로 하늘 가리고 애써 이글대는 태양을 보면 홀로 선 내 그림자 너무 작았네 벗이여, 이리 오세요 홀로 선 채 이 세상 슬픔이 지워지나요 나뭇잎과 나뭇잎이 손잡고 한여름 감미로운 그늘을 만들어 가듯 우리도 손깍지를 끼워봅시다 네 근심이 나의 근심이 되고 네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때 벗이여, 우리도 서로의 그늘 아래 쉬어 갑시다 🍒 ❄출처 : 홍수희 시집, 『생일을 맞은 그대에게』, 해드림출판사, 2019. 🍎 해설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은 친구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친구밖에 없다.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

좋은시 2023.11.04

이영광 사랑의 발명

이영광 사랑의 발명.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다. 사랑의 발명 /이영광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 ❄출처 : 이영광 시집, 『나무는 간다』, 창비, 2013. 🍎 해설 이 시에서 번개치듯 나를 전율시킨 감동의 구절은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라는 대목이다. 참신하고 창조적이다. 살다보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 파고 들어가” 조용히 죽고 싶을 때가 어디 한두 번인가? 너무나 사는 게 힘들어하는 사람을 지켜보다가 더는 지켜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

좋은시 2023.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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