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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무명시인M 2023. 11. 25.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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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자의 외간 남자가 되어. 사내들의 일탈의 충동이란?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려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 눈곱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쫒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고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속처럼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눈에는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 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 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술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도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 되겠는가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
 
* 이 시는 김명인 시인의 「너와집 한 채」가운데 한 구절에서 운을 빌려왔다.(시인의 각주.)
 
❄출처 : 김사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06.
 

🍎 해설

이 시의 말미에 김명인 시인의 시에서 운을 빌려왔다고 밝혀놓고 있다. 이 김명인 시인의 ‘너와집 한 채’는 세속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온 자의 마지막 꿈이 다다른 곳은 산간 오지다. 거기서 세속으로 돌아갈 길을 아예 지우겠다는 것, 즉 길을 잃음으로써 온전한 삶을 회복하겠다는 역설의 미학이었다.
 
제목이 길기도 하다. 김사인 시인의 이 시는 ‘나이 어린 처녀’와 인생을 탕진해버리고 싶은 사내를 등장시킨다. 생업에 관심도 없이 날마다 주막으로 가서 술이나 얻어먹고, 노름이나 하고, 그 처자의 몸에 아이를 벌레처럼 ‘슬어놓고’, 그저 자신은 무능하겠다고 공언하고, 몹쓸 병이 들어도 숨겨놓은 술을 마시겠다고 장담한다. 퇴폐와 방종과 무능력과 무책임의 극치다.
 
이 시도 반어법이다. 역설의 미학이다. 사내라면 이 퇴폐와 무능력과 무책임의 유혹을 한번쯤 꿈꿀 수도 있다. 좋게 말한다면 가끔 일탈의 충동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윽고 대부분의 사내들은 인생을 탕진하지는 않는다. 사내들은 제 아내와 아이들을 잘 먹여 살리는데 골몰하면서 일생을 보낸다.
 
더욱이 진인사대천명의 시대는 가고 진인사대처명盡人事待妻命의 시대가 시작된지도 오래다. 오늘날 이런 인생 탕진형 사내가 남편으로서 살아 남을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시는 오늘날 더 생명력과 감수성을 갖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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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 눈곱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쫒아가겠네
 
그렇게 한두 십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눈에는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 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 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그 여자 못마시던 술도 배우리 욕도 배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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