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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 20

오규원 내가 꽃으로 핀다면

오규원 내가 꽃으로 핀다면. 소박하면서도 겸손하게 살고 싶은 꿈. 내가 꽃으로 핀다면 /오규원 내가 만약 꽃이라면 어디에서 피어야 할까 꽃밭도 없는 우리 집 창문 밑에서 토끼풀과 섞여 있다가 한참 자라서 벽을 타고 올라 창문을 똑 똑 똑 두드리며 피어야할까 산골짜기 개암나무와 망개나무의 가지와 잎 사이로 다람쥐처럼 잠깐 잠깐 얼굴을 내밀었다가 숨겼다가 하면서 피어야 할까 아니면 강변 바위 그늘에서 새끼를 키우는 물새와 함께 물소리를 들으며 조약돌처럼 물새알처럼 작지만 동그랗게 피어야 할까 🍒 ❄출처 : 오규원 시집, 『오규원 시전집』, 문학과지성사, 2017. 🍎 해설 오규원 시인(1941~2007년, 향년 66세)은 아름다운 서정시를 많이 남겼다. 아직도 팬이 많다. 이 시는 시인의 인생관이 살짝 비쳐..

좋은시 2024.03.30

전봉건 피아노

전봉건 피아노. 인상주의 화가의 추상화. 피아노 /전봉건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 ❄출처 : 전봉건 시집, 『전봉건 시선』,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2. 🍎 해설 이 작품은 신선하고 생기 있는 피아노 소리의 감각과 이에 대한 감동을 대담한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한 한 폭의 추상화 같은 시이다. 1연에서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여인의 손가락을 물고기가 쏟아지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그 피아노의 선율이 들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2연에서 바다의 모습에 다가선다. 가장 신나게 일고 있는 파도를 집어든다. 이것이 ..

좋은시 2024.03.28

김용택 짧은 이야기

김용택 짧은 이야기. 금사과, 그 속에는 짧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 짧은 이야기 /김용택 사과 속에는 벌레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사과는 그 벌레의 밥이요, 집이요, 옷이요, 나라였습니다. 사람들이 그 벌레의 집과 밥과 옷을 빼앗고 나라에서 쫓아내고 죽였습니다. 누가 사과가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정했습니까. 사과는 서러웠습니다. 서러운 사과를 사람들만 좋아라 먹습니다. 🍒 ❄출처 : 김용택 시집, 『그 여자네 집』, 창작과비평사, 1998. 🍎 해설 벌레에게 사과는 ‘밥, 잠, 옷이자 나라’다. 사람들은 사과를 독차지하기 위해 벌레를 쫓아내고 죽이는 것을 당연시한다. 사과나 사과벌레를 인간과 더불어 공생하는 존재로 생각할 수 없을까? 시인은 사과를 통해 사람을 불러 냄으로써 사람들의 자연친화적인 삶을..

짧은 시 2024.03.26

고은 꽃보다 먼저

고은 꽃보다 먼저. 그대의 마음이 봄을 가져 온다. 꽃보다 먼저 /고은 아기 노루귀 꽃 아직 멀었니? 산수유 열흘 굶은 가지 너 산수유 꽃도 아직 멀었니? 손 시려라 손 시려라 지금 어린 날벌레 한 녀석이 먼저 큰 봄을 가지고 오누나. 🍒 ❄출처 : 고은 시집, 『허공』, 창비, 2008. 🍎 해설 봄이 오고 있다. 봄은 노루귀 꽃이나 산수유 꽃이 가져 오는 것이 아니다. 날벌레 한 녀석이 먼저 큰 봄을 가져 온다. 마찬가지로 그대의 마음이 정말 큰 봄을 가져 온다. 아기 노루귀 꽃 아직 멀었니? 산수유 열흘 굶은 가지 너 산수유 꽃도 아직 멀었니? 손 시려라 손 시려라 지금 어린 날벌레 한 녀석이 먼저 큰 봄을 가지고 오누나.

짧은 시 2024.03.25

김기택 맨발

김기택 맨발. 속박에서 벗어나 맨발이 되는 해방감과 자유. 맨발 /김기택 집에 돌아오면 하루종일 발을 물고 놓아주지 않던 가죽구두를 벗고 살껍질처럼 발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던 검정 양말을 벗고 발가락 신발 숨쉬는 살색 신발 투명한 바람 신발 벌거벗은 임금님 신발 맨발을 신는다 🍒 ❄출처 : 김기택 시집, 『사무원』, 창작과비평사, 1999. 🍎 해설 하루종일 구두 속에 속박돼 있던 발이 해방되는 순간은 집에 돌아와 구두를 벗는 순간이다. 하루종일 속박에서 벗어나 비로소 편안함과 자유를 얻는 순간이다. ‘맨발을 신발처럼 신는다’는 것은 어린이의 상상력이다. 가끔은 이런 어린이의 상상력을 가슴에 품고 전정한 자유인으로서의 꿈을 펼쳐보는 것이 필요하다. 집에 돌아오면 하루종일 발을 물고 놓아주지 않던 가죽구..

짧은 시 2024.03.23

신석정 산산산

신석정 산산산. 올해에는 산을 좀 더 자주 바라다보자. 산산산 /신석정 지구엔 돋아난 산이 아름다웁다. 산은 한사코 높아서 아름다웁다. 산에는 아무 죄 없는 짐승과 에레나보다 어여쁜 꽃들이 모여서 살기에 더 아름다웁다. 언제나 나도 산이 되어 보나 하고 기린같이 목을 길게 늘이고 서서 멀리 바라보는 산 산 산 🍒 ❄출처 : 『신석정 시선』, 지식을만드는지식, 2013. 🍎 해설 시인은 생전에 자신의 서재에 ‘침묵은 산의 얼굴이니라. 숭고는 산의 마음이니라. 나 또한 산을 닮아 보리라.’는 구절을 써 붙여 놓고 이윽히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의 좌우명도 知在高山流水, ‘뜻이 높은 산과 흐르는 물에 있다’이다. 시인의 산은 ‘한사코/높아서 아름다웁’고, ‘아무 죄 없는 짐승과/에레나보다 어여쁜 꽃들이/모여서 ..

좋은시 2024.03.22

나태주 꽃잎

나태주 꽃잎. 촌철의 반전 감성의 서정시. 꽃잎 /나태주 활짝 핀 꽃나무 아래서 우리는 만나서 웃었다 눈이 꽃잎이었고 이마가 꽃잎이었고 입술이 꽃잎이었다 우리는 술을 마셨다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사진을 찍고 그 날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돌아와 사진을 빼보니 꽃잎만 찍혀 있었다. 🍒 ❄출처 : 나태주 시집,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지혜, 2015. 🍎 해설 화창한 봄날,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행복한 순간들이 나타난다. 활짝 핀 꽃나무 아래에서 키스도 하고 술도 함께 마신다. 그러나 이제 사진만 남았다. 비록 헤어졌지만 꽃잎 하나하나 속에 사랑의 슬픔과 그리움이 애잔하게 남아 있다. 촌철의 반전 감성의 서정시다. 활짝 핀 꽃나무 아래서 우리는 만나서 웃었다 눈이 꽃잎이었고 이마가 꽃잎이었고 입술이 꽃..

좋은시 2024.03.21

이기철 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

이기철 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 휴식이 필요하다. 벚꽃 그늘 아래에 앉아 보자. 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 /이기철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 놓아 보렴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 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 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 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 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 놓고 구름처럼 하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 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 놓아 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 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 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 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동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 통장도 벗어 놓고 벚..

좋은시 2024.03.20

백석 북방에서

백석 북방에서. 찬란했던 우리 역사에 대한 회한과 자책. 북방에서 정현웅에게 /백석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扶餘)를 숙신(肅愼)을 발해(勃海)를 여진(女眞)을 요(遼)를 금(金)을 흥안령(興安嶺)을 음산(陰山)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었다 나는 그때 아모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잦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침에는..

좋은시 2024.03.18

정호승 꽃 지는 저녁

정호승 꽃 지는 저녁. 꽃이 진다. 떠나간 사람이 생각난다. 꽃 지는 저녁 /정호승 꽃이 진다고 아예 다 지나 꽃이 진다고 전화도 없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지는 꽃의 마음을 아는 이가 꽃이 진다고 저만 외롭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꽃지는 저녁에는 배도 고파라 ❄출처 : 정호승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열림원, 2008. 🍎 해설 꽃이 지는 장면은 참 슬프다. 꽃은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것을 상징하는데 그것이 시들고 떨어지는 장면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떠나간 사람으로 인한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고 있다. 꽃이 지는 것을 보면 누구나 외롭고, 누구나 슬프다. 하지만 아무리 꽃이 져도 그렇지, 왜 나를 잊었느냐고 묻는다. 꽃이 지는 상황에서도, 나는 그대를 잊은 적 없..

좋은시 2024.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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