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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옛날의 그 집

박경리 옛날의 그 집. 토지 박경리 작가가 남긴 마지막 시. 옛날의 그 집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

좋은시 2024.02.27

황지우 거룩한 식사

황지우 거룩한 식사. 그 어떤 것도 밥 다음이다.거룩한 식사/황지우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을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 ❄출처 : 황지우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지성사, 1998. 🍎 해설춘궁기라는 절대빈곤의 시대.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 식은 밥을 ..

좋은시 2024.02.26

신경림 앞이 안 보여 지팡이로 더듬거리며

신경림 앞이 안보여 지팡이로 더듬거리며. 판자 다리를 위태롭게 건너고 있는 것이 인생. 앞이 안보여 지팡이로 더듬거리며 /신경림 앞 못 보는 사람이 개울을 건너고 있다. 지팡이로 판자 다리를 더듬으며 빠질 듯 빠질 듯 위태롭게 개울을 건너고 있다. 나는 손에 땀을 쥔다 가슴이 죈다 꿈속에서처럼 가위 눌려 소리도 지르지 못한다. 그러다 문득 나는 개울을 건너고 있는 것이 그가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안다. 앞이 안보여 지팡이로 더듬거리며 빠질 듯 빠질 듯 위태롭게 개울을 건너고 있는 것이 우리들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안다. 사람들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안타깝게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그 앞을. 🍒 ❄출처 : 신경림 시집,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1993. 🍎 해설 이 시에는 우선 반전의 ..

좋은시 2024.02.25

이기철 이향

이기철 이향. 인간의 원천적 그리움인 향수. 이향(離鄕) /이기철 제대를 하고 대학을 졸업하면 나는 개나리꽃이 한 닷새 마을의 봄을 앞당기는 산란초 뿌리 풀리는 조그만 시골에서 시나 쓰는 가난한 서생이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고급 장교가 되어 있는 국민학교 동창과 개인회사 중역이 되어 있는 어릴 적 친구들이 모두 마을을 떠날 때 나는 혼자 다시 이 마을로 돌아와 탱자나무 울타리를 손질하는 초부가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눈 속에서 지난해 지워진 쓴냉이 잎새가 새로 돋고 물레방앗간 뒷쪽에 비비새가 와서 울면 간호원을 하러 독일로 떠난 여자 친구의 항공엽서나 기다리며 느린 하학종을 울리는 낙엽송 교정에서 잠처럼 조용한 풍금소리를 듣는 2급 정교사가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시간은 물처럼 흘러갔..

좋은시 2024.02.24

고현혜 집으로

고현혜 집으로. 밖에서 헤매지말고 집으로 돌아가세요. 집으로 /고현혜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세요. 그대 집에 죽어가는 화초에 물을 주고 냉기 가득한 그대 부엌 큰솥을 꺼내 국을 끓이세요. 어디선가 지쳐 돌아올 아이들에게 언제나 꽃이 피어 있는 따뜻한 국이 끓는 그대 집 문을 열어주세요. 문득 지나다 들르는 외로운 사람들에게 당신 사랑으로 끓인 국 한 그릇 떠주세요. 그리고 지금 당신 곁에 있는 사람 목숨 바쳐 사랑하세요. 🍒 ❄출처 : 고현혜 시집, 『나는 나의 어머니가 되어』, 푸른사상, 2015. 🍎 해설 때때로 우리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잊고 살기도 한다. 자기 집의 소중함, 배우자의 소중함을 잊고 살기도 한다. 시인은 밖에서 방황하지 말고 화초가 싱싱하게 되살아나고, 부엌에는 온기가..

좋은시 2024.02.23

이성선 귀를 씻다

이성선 귀를 씻다. 당신에게서는 山향기가 나는가요? 귀를 씻다 ―山詩 2 /이성선 산이 지나가다가 잠깐 물가에 앉아 귀를 씻는다 그 아래 엎드려 물을 마시니 입에서 산(山)향기가 난다 🍒 ❄출처 : 이성선 시집, 『산시』, 시와, 2013. 🍎 해설 산 속 호수가에서 보면 묵직한 산이 구름과 함께 수면에 비친다. 산이 움직인다. 산이 물가에 앉아 세파를 씻어 내려는 듯 귀를 씻는다. 나도 귀를 씻은 후에 입을 수면에 대고 맑게 솟은 물을 마신다. 입안에서는 싱그러운 산山의 냄새가 난다. 산의 향기는 아마 헛된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운 겸허한 사람의 향기가 아닐까? 당신에게서는 어떤 향기가 나는가? 짧게 써서 하늘의 침묵에 닿을 수 있기를 기원했던 시인은 자연과의 대화 속에 동양적 달관의 세계를 추구했다..

짧은 시 2024.02.22

신현정 모자

신현정 모자. 모자를 쓰면 여행을 간 기분이다. 모자 /신현정 나는 분명히 모자를 쓰고 있는데 사람들은 알아보지를 못한다 그것도 공작 깃털이 달린 것인데 말이다 아무려나 나는 모자를 썼다 레스토랑으로 밥 먹으러 가서도 모자를 쓰고 먹고 극장에서도 모자를 쓰고 영화를 보고 미술관에서도 모자를 쓰고 그림을 감상한다 나는 모자를 쓰고 콧수염에 나비넥타이까지 했다 모자를 썼으므로 난 어딜 조금 가도 그걸 여행이거니 한다 나는 절대로 모자를 벗지 않으련다 이제부터는 인사를 할 때도 모자를 쓰고 하리라. 🍒 ❄출처 : 신현정 시집, 『난쟁이와 저녁식사를』, 호북인민출판사, 2009. 🍎 해설 모자를 쓰면 어디에 조금 가도 먼 데 가는 것 같다. 여행하는 때처럼 재미가 있다. 공작 깃털이 달린 모자를 쓰고 콧수염에 ..

좋은시 2024.02.21

박노해 도토리 두 알

박노해 도토리 두 알. 도토리 키재기. 훌륭한 참나무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도토리 두 알 /박노해 산길에서 주워든 도토리 두 알 한 알은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 한 알은 크고 윤나는 도토리 나는 손바닥의 도토리 두 알을 바라본다 너희도 필사적으로 경쟁했는가 내가 더 크고 더 빛나는 존재라고 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싸웠는가 진정 무엇이 더 중요한가 크고 윤나는 도토리가 되는 것은 청설모나 멧돼지에게나 중요한 일 삶에서 훨씬 더 중요한 건 참나무가 되는 것 나는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를 멀리 빈숲으로 힘껏 던져주었다 울지 마라, 너는 묻혀서 참나무가 되리니 🍒 ❄출처 : 박노해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느린걸음, 2010. 🍎 해설 산길에서 주워든 도토리 두 알." '크고 윤나는..

좋은시 2024.02.20

이성선 북두칠성

이성선 북두칠성. 사랑하는 그녀가 마음을 열어 주지 않을 때.북두칠성/이성선누가 저 높은 나무 끝에 열쇠를 걸어 놓았나. 저녁 풀잎 사이 샛길로 몰래 가서 저 열쇠를 내려 사랑하는 사람의 방문을 열라는 것인가. 밤하늘에 그려진 저 손을 가져다가 차가운 그녀의 가슴을 열라는 것인가. 🍒 ❄출처 : 이성선 시집, 『빈 산이 젖고 있다』, 미래사, 1991. 🍎 해설그녀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녀는 좀처럼 가슴을 열어주지 않는다. 그날도 그녀를 생각하며 밤길을 걸었다. 밤 하늘을 보니 일곱 개의 북두칠성이 반짝반짝 빛난다. 보통 사람 눈에는 국자로 보이지만 북두칠성은 꼭 열쇠를 닮기도 했고 손을 닮기도 했다. 저 북두칠성이 그녀의 방문을 여는 열쇠가 되고 또 그녀의 가슴을 여는 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

짧은 시 2024.02.19

복효근 별똥별

복효근 별똥별. 당신의 자서전은 무엇인가요? 별똥별 /복효근 생生과 사死를 한 줄기 빛으로 요약해버리는 어느 별의 자서전 🍒 ❄출처 : 복효근 시집, 『꽃 아닌 것 없다』, 천년의시작, 2023. 🍎 해설 복효근 시인은 짧은 시의 창작을 시도하고 있다. 짧지만 긴 여운, 의표를 찌르는 해학과 통찰의 시편들은 인터넷 시대에 시가 어떻게 사람들의 가슴에 스밀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문학적 소통의 시금석이자 내비게이션이다. 재치문답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시 언어의 경제성과 삶을 관통하는 통찰이 짧은 시에 서정적으로 압축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짧은 시도 삶과 세계를 통찰하는 시적 직관이 잘 디자인 되어 있다. 모든 사물, 모든 생명에는 자서전이 있다. 내 삶을 뒤돌아 본다. 또 내 여생을 생각해 본다. 내 생..

짧은 시 2024.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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