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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글 1207

정병근 안부

정병근 안부. 이번 연말에는 안부만 묻지말고 밥 한 끼 같이 먹기를...안부/정병근언제 한 번 만나자는 말조만간 한잔하자는 말믿지 말자 전화를 끊으면서그것은 내가 한 말이기도 했으므로약속은 아직 먼 곳에 있고나는 여전히 동문서답의 헛바퀴를 돈다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일이어디 약속뿐이랴 뱉은 만큼못다 한 말들 입속에 바글거리고만나면 만날수록 결별만 수북수북 쌓인다그런 게 다 인생이라고 나는 제법늙어서 흰머리를 툭툭 털면서발톱을 깎으면서 안경알을 닦으면서생각하건데, 나는 죄의 신봉자였으니일기장은 날마다 내게 반성을 촉구했고지키지 못했으므로 반성은더 많은 반성을 몰고 왔다나, 이윽고 죄 많아 빼도 박도 못하겠으니그대 어디쯤 잘 계시는가 제법 늙었는가이 꽃이 지기 전에우리, 폐단처럼 꼭 한잔하자 ❄출처: ..

좋은시 2024.12.17

안도현 재테크

안도현 재테크. 우직한 거꾸로 재테크.재테크/안도현한 평 남짓 얼갈이배추 씨를 뿌렸다스무 날이 지나니 한 뼘 크기의 이파리가 몇 장 펄럭였다바람이 이파리를 흔든 게 아니었다. 애벌레들이제 맘대로 길을 내고 똥을 싸고 길가에 깃발을 꽂는 통에 설핏 펄럭이는 것처럼 보였던 것동네 노인들이 혀를 차며 약을 좀 하라 했으나그래야지요, 하고는 그만두었다한 평 남직 애벌레를 키우기로 작심했던 것또 스무 날이 지나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나는 한 평 얼갈이배추밭의 주인이자 나비의 주인이 되는 것그리하여 나비는 머지않아 배추밭 둘레의 허공을 다 차지할 것이고나비가 날아가는 곳까지가, 나비가 울타리를 치고 돌아오는 그 안쪽까지가모두 내 소유가 되는 것 ❄출처 : 안도현 시집, 『북항』, 문학동네, 2012. 🍎 해설얼갈..

좋은시 2024.12.16

복효근 우산이 좁아서

복효근 우산이 좁아서. 비 오는 날 한 우산 속의 커플.우산이 좁아서/복효근왼쪽에 내가오른쪽엔 네가 나란히 걸으며비바람 내치리는 길을좁은 우산 하나로 버티며 갈 때그 길 끝에서내 왼쪽 어깨보다 덜 젖은 네 어깨를 보며다행이라 여길 수 있다면길이 좀 멀었어도 좋았을걸 하면서내 왼쪽 어깨가 더 젖었어도 좋았을걸 하면서젖지 않은 내 가슴 저 안쪽은 오히려 햇살이 짱짱하여그래서 더 미안하기도 하면서 🍒 ❄출처 : 복효근 시집, 『따뜻한 외면』, 실천문학사, 2013. 🍎 해설하나의 우산 밑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걷는다.상대방의 어깨가 젖을까 내 한쪽 어깨를 흠뻑 적셨다. 자신의 옷이나 자신의 어깨가 젖지 않으면 상대에게 미안하다. 한 우산 속, 반쯤 젖은 남자의 등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작은 배려의..

좋은시 2024.12.04

손택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손택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치열한 삶도 많이 있다.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손택수명절 앞날 세탁소에서 양복을 들고 왔다양복을 들고 온 아낙의 얼굴엔주름이 자글자글하다내 양복 주름이 모두아낙에게로 옮겨간 것 같다범일동 산비탈 골목 끝에 있던 세탁소가 생각난다겨울 저녁 세탁, 세탁하얀 스팀을 뿜어내며세탁물을 얻으러 다니던 사내그의 집엔 주름 문이 있었고아코디언처럼 문을 접었다 펴면타향살이 적막한 노래가 가끔씩 흘러나왔다치익 칙 고향역 찾아가는 증기기관차처럼하얀 스팀을 뿜어내던 세탁소세상의 모든 구불구불한 골목들을온몸에 둘둘 감고 있다고 생각했던 집세탁소 아낙이 아파트 계단을 내려간다계단이 접혔다 펴지며 아련한 소리를 낸다 🍒 ❄출처 : 손택수 시집, 『나무의 수사학』, 실천문학사, 2010. 🍎 해설..

좋은시 2024.12.03

오규원 고요

오규원 고요. 묵묵히 견뎌야 하는 삶.고요/오규원라일락 나무 밑에는 라일락 나무의 고요가 있다.바람이 나무 밑에서 그림자를 흔들어도 고요는 고요하다비비추 밑에는 비비추의 고요가 쌓여 있고때죽나무 밑에는 개미들이 줄을 지어때죽나무의 고요를 밟으며 가고 있다.창 앞의 장미 한 송이는 위의 고요에서 아래의 고요로 지고 있다. 🍒 ❄출처 : 오규원 시집, 『두두』, 문학과 지성사, 2008. 🍎 해설*비비추: 옥잠화와 비슷한 꽃. 아직 라일락은 오지 않았고 장미는 멀리 있다. 지금은 라일락의 계절, 뭔가 흔들리고 있는데. 라일락 아래는 '라일락의 고요', 비비추 아래는 '비비추의 고요'. 마찬가지로 그대에게는 그대의 고요, 슬픔에게는 슬픔의 고요가 있다. 고요와 고요 사이에 고요가 서있다. 고요는 평화롭고 ..

좋은시 2024.12.02

김선태 마음에 들다

김선태 마음에 들다. 사랑은 마음의 안방을 내어주는 일.마음에 들다/김선태너를 향한 마음이 내게 있어서바람은 언제나 한쪽으로만 부네 나는 네가 마음에 들기를 바라는 집대문도 담장도 없이 드나들어도 좋은 집 마음에 든다는 것은 서로에게 스미는 일온전히 스미도록 마음의 안방을 내어주는 일 하지만 너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사람나는 촛불을 켜고 밤늦도록 기다리는 사람 그렇게 기약 없는 사랑일지라도그렇게 공허한 행복일지라도 너를 향한 마음이 내게 있어서바람은 한쪽으로만 부네 🍒 ❄출처 : 김선태 시집, 『그늘의 깊이』, 문학동네, 2014. 🍎 해설사랑의 마음의 바람이 불면 우리는 그 바람을 멈추지 못한다. 그 사람에게 내 안방을 내주었기에 그 사람이 내 마음에 스며 들었다. 촛불이 다 닳도록 그 사람이 오..

좋은시 2024.12.01

김소월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김소월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김소월 명시 중의 하나.예전엔 미처 몰랐어요/김소월봄 가을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운줄도'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줄을'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줄은'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출처 : 김소월 시집,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스타북스, 2024. 🍎 해설이 역작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로 인한 그리움과 설움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을 아우르는 뛰어난 서정시다. 민요조의 리듬 속에서 ‘예전엔 미쳐 몰랐어요’란 후렴구가 반복되면서 아름다운 시적 판타지가 표현되고 있다. 그리움을 알기 전에는 단순한 자연에 지나지 않았던 달이 사랑이 싹트다 보니 점점 그리움을 촉발시키는 연정의 전령사가 되어..

좋은시 2024.11.30

이대흠 옛날 우표

이대흠 옛날 우표. 우표를 침으로 붙이던 종이 편지가 그립다.옛날 우표/이대흠혀가 풀이었던 시절이 있었지먼 데 있는 그대에게 나를 태워 보낼 때우표를 혀끝으로 붙이면내 마음도 찰싹 붙어서 그대를 내 쪽으로끌어당길 수 있었지 혀가 풀이 되어그대와 나를 이었던 옛날 우표 그건 다만 추억 속에서나 있었을 뿐이지어떤 본드나 풀보다도서로를 단단히 묶을 수 있었던 시절그대가 아무리 먼 곳에 있더라도우리는 떨어질 수 없었지 혀가 풀이었던 시절이 있었지사람의 말이 푸르게 돋아순이 되고 싹이 되고이파리가 되어 펄럭이다가마침내 꽃으로 달아올랐던 시절 그대의 손끝에서 만져질 때마다내 혀는 얼마나 달아올랐을까그대 혀가 내게로 올 때마다나는 얼마나 뜨거운 꿈을 꾸었던가 그대의 말과 나의 꿈이 초원을 이루고이따끔은 배부른 말 떼..

좋은시 2024.11.29

안도현 겨울 편지

안도현 겨울 편지. 사랑은 더디게 온다. 이게 겨울의 메시지다.겨울 편지/안도현흰 눈 뒤집어쓴 매화나무 마른 가지가부르르 몸을 흔듭니다 눈물겹습니다머지않아꽃을 피우겠다는 뜻이겠지요 사랑은 이렇게 더디게 오는 것이겠지요 🍒 ❄출처 : 안도현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 푸른숲, 1991. 🍎 해설머지않아 꽃을 피우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인가, 흰 눈 뒤집어쓴 매화나무 마른 가지가 부르르 몸을 흔든다.  사랑이란 이렇게 더디게 온다. 매화나무가 힘든 겨울을 이겨내고 어렵게 새 잎을 돋아내듯 사랑은 힘들게 온다.  그러나 사랑은 봄을 앞 둔 겨울의 매화나무처럼 인고의 계절을 거치면 값지게 온다.  흰 눈 뒤집어쓴 매화나무 마른 가지가부르르 몸을 흔듭니다 눈물겹습니다머지않아꽃을 피우겠다는 뜻이겠지요 사..

짧은 시 2024.11.28

천양희 사람의 일

천양희 사람의 일.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사람의 일 /천양희고독 때문에 뼈아프게 살더라도사랑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고통 때문에 속 아프게 살더라도이별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사람을 다칩니다. 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사람과 만나면 우린 또 허기집니다. 언제까지 우린 사람의 일과싸워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 때문에 하루는 살 만하고사람 때문에 하루는 막막합니다.  하루를 사는 일이 사람의 일이라서우린 또 사람을 기다립니다.사람과 만나는 일, 그것 또한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 ❄출처 : 천양희 시집, 『오래된 골목』, 창비, 2003. 🍎 해설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우리는 매일 사람을 만나며 산다. 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 사람과 만나면 우린 또 허기진다. 사..

좋은시 2024.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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