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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글 1134

이해인 봄이 오는 길목에서

이해인 봄이 오는 길목에서. 오늘 양력 2월 4일은 입춘이다. 봄이 오는 길목의 시작이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이해인 하얀 눈 밑에서도 푸른 보리가 자라듯 삶의 온갖 아픔 속에서도 내 마음엔 조금씩 푸른 보리가 자라고 있었구나 꽃을 피우고 싶어 온몸이 가려운 매화 가지에도 아침부터 우리 집 뜰 안을 서성이는 까치의 가벼운 발걸음과 긴 꼬리에도 봄이 움직이고 있구나 아직 잔설이 녹지 않은 내 마음의 바위 틈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일어서는 봄과 함께 내가 일어서는 봄 아침 내가 사는 세상과 내가 보는 사람들이 모두 새롭고 소중하여 고마움의 꽃망울이 터지는 봄 봄은 겨울에도 숨어서 나를 키우고 있었구나 🍒 ❄출처 : 이해인 시집, 『기다리는 행복』, 샘터, 2017. 🍎 해설 오늘 양력 2월 4일은 입춘..

좋은시 2024.02.04

공광규 무량사 한 채

공광규 무량사 한 채. 아내에 대한 존경심이 묻어 있는 사랑.무량사 한 채 /공광규오랜만에 아내를 안으려는데 ‘나 얼마만큼 사랑해’라고 묻습니다 마른 명태처럼 늙어가는 아내가 신혼 첫날처럼 얘기하는 것이 어처구니없어 나도 어처구니없게 그냥 ‘무량한 만큼’이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무량이라니! 그날 이후 뼈와 살로 지은 낡은 무량사 한 채 주방에서 요리하고 화장실서 청소하고 거실에서 티비를 봅니다 내가 술 먹고 늦게 들어온 날은 목탁처럼 큰소리를 치다가도 아이들이 공부 잘하고 들어온 날은 맑은 풍경소리를 냅니다 나름대로 침대 위가 훈훈한 밤에는 대웅전 나무문살 꽃무늬단청 스치는 바람소리를 냅니다 🍒 ❄출처 : 공광규 시집, 『말똥 한덩이』, 실천문학사, 2008. 🍎 해설남편 누구나 ‘나 얼마만큼 사랑해’라..

좋은시 2024.02.03

민병도 삶이란

민병도 삶이란. 삶이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삶이란/민병도풀꽃에게 삶을 물었다 흔들리는 일이라 했다 물에게 삶을 물었다 흐르는 일이라 했다 산에게 삶을 물었다 견디는 일이라 했다 🍒 ❄출처 : 민병도 시집, 『삶이란』, 목언예원, 2021. 🍎 해설“삶이란 무엇인가요? 성철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유명한 법어를 남겼다. 삶이란 무엇인가? 풀꽃에게 물었더니 ‘흔들리는 일’이라 한다. 물에게 물었더니 ‘흐르는 일’이라 한다. 산에게 물었더니 '견디는 일'이라 한다. 화가인 시인은 풀꽃, 물, 산이라는 한 폭의 수채화에 삶의 다양한 모습을 담았다. 결국 우리는 흔들리며, 흐르며, 견디면서 살아 나가야 한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풀꽃에게 삶을 물었다 흔들리는 일이라 했다 물에게 삶을 물..

짧은 시 2024.02.02

김종삼 나의 본적

김종삼 나의 본적. 나의 본적은 인류의 짚신이고 맨발이다. 나의 본적(本籍) /김종삼 나의 본적은 늦가을 햇볕 쪼이는 마른 잎이다. 밟으면 깨어지는 소리가 난다. 나의 본적은 거대한 계곡이다. 나무 잎새다. 나의 본적은 푸른 눈을 가진 한 여인의 영원히 맑은 거울이다. 나의 본적은 차원을 넘어 다니지 못하는 독수리다. 나의 본적은 몇 사람밖에 안 되는 고장 겨울이 온 교회당 한 모퉁이다. 나의 본적은 인류의 짚신이고 맨발이다. 🍒 ❄출처 : 김종삼 시집, 『김종삼 전집』, 나남, 2005. 🍎 해설 본적(本籍)은 호적이 있는 곳, 어떤 사람이 태어나고 살던 곳이다. 한 사람의 정체성, Identity다. 시인은 자신의 본적을 찾아 해멘다. 자신의 본적은 늦가을 햇볕 쪼이는 마른 잎이었으나 밟으면 깨어지는..

좋은시 2024.02.01

조지훈 행복론

조지훈 행복론. 행복은 내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행복론 /조지훈 멀리서 보면 보석인 듯 주워서보면 돌멩이 같은 것 울면서 찾아갔던 산 너머 저 쪽 아무데도 없다 행복이란 스스로 만드는 것 마음 속에 만들어 놓고 혼자서 들여다 보며 가만히 웃음짓는 것 아아 ! 이게 모두 과일나무였던가 웃으며 돌아온 초가삼간 가지가 찢어지게 열매가 익었네. 🍒 ❄출처 : 조지훈, 『조지훈 전집』, 나남출판 , 1996. 🍎 해설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해멘다. 칼 붓세는 이렇게 노래한다. “산 너머 언덕 너머 먼 하늘 밑 행복이 있다고 말을 하건만. 아, 사람들 따라 찾아갔다가 눈물만 머금고 되돌아왔네 산 너머 언덕 너머 더 멀리에는 행복이 있다고 말을 하건만.” 조지훈 시인은 “행복이란 스스로 만드는 것 마음 속에 만들어..

좋은시 2024.01.31

노천명 감사

노천명 감사.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감사 /노천명 저 푸른 하늘과 태양을 볼 수 있고 대기를 마시며 내가 자유롭게 산보할 수 있는 한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이것만으로 나는 신에게 감사할 수 있다. 🍒 ❄출처 : 노천명 전 시집, 『사슴의 노래』, 스타북스, 2020. 🍎 해설 괴테는 라는 제목의 시에서 “신선한 공기, 빛나는 태양 맑은 물, 그리고 친구들의 사랑 이것만 있다면 낙심하지마라.”, 이렇게 노래했다. 노천명 시인의 이 짧은 시도 이와 비슷한 주제를 응축한 시다. 시인의 시적 재능은 탁월하다. 사실 저 푸른 태양을 볼 수 있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자신의 발로 자유롭게 걸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게 되면 충분히 행복한 것이다. 저 푸른 하늘과 태..

짧은 시 2024.01.30

최동호 돌담

최동호 돌담. 바람 많고 돌 많고 여자 많다는 제주도. 짧은 시. 돌담 최동호 제주 남풍 파도 타고 아무리 불어도 노래하던 처녀애들 치마끈 풀어야 돌담에 봄바람 난다 🍒 ❄출처 : 『서정시학 2023년 겨울호』, 서정시학, 2023. 🍎 해설 이 짧은 시에는 기승전결의 논리가 있다. 뒤집어지는 전복의 미학과 번뜩임의 섬광 사이에 통찰과 서정의 뿌리를 그대로 응축하고 있다. 돌 많고 바람 많고 여자 많다는 제주도 돌담에 봄바람 난다는 전복의 미학이 서정적 해학적으로 응축되어 있다. 시는 어렵고 고상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시를 생활 속에서 쉽고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것으로 느끼게 함으로써 시의 대중성을 높이려는 시도는 높이 평가할만 하다. 길고 난해한 시 보다는 짧고 쉬운 시는 아무래도 대중성이 더 높다...

짧은 시 2024.01.29

문정희 편안한 사람

문정희 편안한 사람. 편안한 사람과 차를 마신다.편안한 사람/문정희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햇살이 찾아드는 창가 오래전부터 거기 놓여 있는 의자만큼 편안한 사람과 차를 마신다 순간인 듯 바람이 부서지고 낮은 목소리로 다가드는 차 맛은 고뇌처럼 향기롭기만 하다 두 손으로 받쳐 들어도 온화한 찻잔 속에서 잠시 추억이 맴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우리가 이렇게 편안한 의자가 되고 뜨거웠던 시간이 한 잔의 차처럼 조용해진 후에는...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햇살이 찾아드는 창가 편안한 사람과 차를 마신다 🍒 ❄출처 : 문정희 시집, 『이 세상 모든 사랑은 무죄다』, 을파소, 1998. 🍎 해설해설남들에게 나는 과연 편안한 사람일까? 남들에게 나는 '오래전부터 거기 놓여 있는 의자만큼 편안한 사람'일까? ‘어김없이..

좋은시 2024.01.28

손택수 자전거의 연애학

손택수 자전거의 연애학. 판소리 가락의 유머 시. 자전거의 연애학 /손택수 홀아비로 사는 내 늙은 선생님은 자전거 연애의 창안자다. 그에 따르면 유별난 남녀 사이를 자전거만큼 친근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없다. 일단 자전거를 능숙하게 탈줄 알아야 혀 탈 줄 안다는 것, 그건 낙법과 관계가 있지. 나는 주로 하굣길에 여학교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점찍어 둔 가방을 낚아채는 방법을 썼어. 그럼 제깐 것이 별 수 있간디, 가방 달라고 죽어라 뛰어오겠지 그렇게만 되면 만사가 탄탄대로라 이 말이야. 지쳐서 더 뛰어오지 못하는 여학생 은근슬쩍 뒤에 태우고 유유히 휘파람이나 불며 달려가면 되는 것이지. 뒤에서 허리를 꼭 잡고 놓지 못하도록 약간의 과속은 필수항목이고, 그렇게 달려가다 갈대숲이나 보리밭이 나오면 어어어 브레..

좋은시 2024.01.27

백석 주막

백석 주막. 민족공동체의 삶을 그린 풍속화. 주막 /백석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은 언제나 맛있었다 부엌에는 빨갛게 질들은 팔(八)모알상이 그 상 우엔 새파란 싸리를 그린 눈알만한 잔(盞)이 뵈였다 아들아이는 범이라고 장고기를 잘 잡는 앞니가 뻐드러진 나와 동갑이었다 울파주 밖에는 장군들을 따라와서 엄지의 젖을 빠는 망아지도 있었다 🍒 ❄출처 : 백석 지음 이동순 편, 『백석 시전집』, 창작과비평사, 1988. 🍎 해설 *붕어곰: 붕어를 졸여서 만든 붕어찜 팔(八)모알상: 팔각형의 개다리소반 장고기: 잔 물고기. 조그마한 민물고기. 울파주: 수수깡, 갈대, 싸리 등으로 엮은 울타리. 바자 울타리. 장날 주막 풍경을 향토색 짙은 언어로 그린 한 폭의 아름다운 풍속화다. 네 개의 영상 이미지가 떠 오른다. 첫..

짧은 시 2024.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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