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좋은시 640

김경미 12월의 시

김경미 12월의 시. 올 한 해를 뒤돌아 보자.12월의 시/김경미열심히 해도 안 되는 일은 버리자 멋대로 하지 말았어야 했던 일과 뜻대로 고집했어야 했던 일 사이를 오가는 후회도 잊자 그 반대도 잊자 오래된 상처는 무딘 발뒤꿈치에게 맡기고 허튼 관계는 손끝에서 빨리 휘발시키자 빠르게 걸었어도 느리게 터벅였어도 다 괜찮은 보폭이었다고 흐르는 시간은 언제나 옳은 만큼만 가고 왔다고 믿자 어떤 간이역도 다 옳았다고 믿자 🍒 ❄출처 : 김경미 시집, 『카프카식 이별』, 문학판, 2020. 🍎 해설또 다시 한 해의 끝자락에 와 서성이고 서 있다. 누구나 한 해를 뒤돌아 보게 된다.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 되는 일이 너무 많다.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일은 과감하게 버리자. 세상엔 후회되는 일도 많다. 그러..

좋은시 2023.12.03

신경림 눈

신경림 눈. 눈이 오면 여러분은 어떤 꿈을 꾸십니까?눈/신경림내 몸이 이 세상에 머물기를 끝내는 날 나는 전속력으로 달려 나갈 테다 나를 가두고 있던 내 몸으로 부터 어둡고 갑갑한 감옥으로 부터 나무에 붙어 잎이 되고 가지에 매달려 꽃이 되었다가 땅속으로 스며 물이 되고 공중에 솟아 바람이 될테다 새가 되어 큰곰자리 전갈자리까지 날아올랐다가 허공에서 하얗게 은가루로 흩날릴 테다 나는 서러워하지 않을 테야 이 세상에서 내가 꾼 꿈이 지상에서 한갓 눈물자국으로 남는다 해도 이윽고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때 가서 다 잊는다 해도...🍒 ❄출처 : 신경림 시집,『낙타』, 창비, 2008. 🍎 해설눈의 계절이 시작된다. 눈은 꿈을 꾸게 만든다. 시인은 죽는 날이 되면 자신을 가두고 있던 몸에서 전속력으로 달려 나가..

좋은시 2023.11.30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자의 외간 남자가 되어. 사내들의 일탈의 충동이란?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김사인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려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 눈곱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쫒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고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년 놓아 보내고 ..

좋은시 2023.11.25

양애경 사랑

양애경 사랑.이별하는 순간 사랑이 끝난 건 아니다.사랑/양애경둘이 같이 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문득 정신 차려 보니 혼자 걷고 있습니다 어느 골목에서 다시 만나지겠지 앞으로 더 걷다가 갈증이 나서 목을 축일 만한 가게라도 만나지겠지 앞으로 더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참 많이도 왔습니다 인연이 끝나고 계속 앞으로 걸어간다고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온 길을 되짚어 걸어가야 합니다 많이 왔을수록 혼자 돌아가는 길이 멉니다. 🍒 ❄출처 : 양애경 시집, 『불이 있는 몇 개의 풍경』, 문학동네, 2021. 🍎 해설이별하는 순간 사랑의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별 또한 사랑의 일부다. 헤어진다고 해서, 이 길을 혼자 걷는다고 해서 사랑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혼자 걷고..

좋은시 2023.11.22

한강 괜찮아

한강 괜찮아. 살다보면 까닭없는 울음이 쏟아질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괜찮아 /한강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 버릴까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젠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서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

좋은시 2023.11.18

노자영 장미

노자영 장미. 사랑에 예쁜 장미만 있었겠는가?장미/노자영장미가 곱다고 꺾어보니까 꽃포기마다 가시입니다 사랑이 좋다고 따라가 보니까 그 사랑 속에는 눈물이 있어요...... 그러나 사람은 모든 사람은 가시의 장미를 꺾지 못해서 그 눈물 사랑을 얻지 못해서 섧다고 섧다고 부르는구려 🍒 ❄출처 : 노자영 제2시집, 『내 혼이 불탈 때』, 1928. / 『노자영 시집』, 토지출판, 2018. 🍎 해설사랑을 되돌아 본다. 예쁜 장미만 있었겠는가? 남들은 모르는 수 많은 가시가 내 몸에, 내 가슴에 박혀 있다. 사랑을 되돌아 본다. 사랑 속에는 남들이 모르는 수 많은 고통과 눈물이 따라 온다. 그러나 이게 사랑의 궤적이고 사랑의 모습이니 어찌할 것인가? 사랑의 가시에 깊이 찔리지 않기 위하여 사랑을 하지 않을 것인..

좋은시 2023.11.17

이기철 사람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다

이기철 사람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다. 당신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다. 사람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다 /이기철 달걀이 아직 따뜻할 동안만이라도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사는 세상엔 때로 살구꽃같은 만남도 있고 단풍잎 같은 이별도 있다. 지붕이 기다린 것만큼 너는 기다려 보았느냐 사람 하나 죽으면 하늘에 별 하나 더 뜬다고 믿는 사람들의 동네에 나는 새로 사 온 호미로 박꽃 한 포기 심겠다. 사람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다. 내 아는 사람이여 햇볕이 데워 놓은 이 세상에 하루만이라도 더 아름답게 머물다 가라. 🍒 ❄출처 : 이기철 시집, 『저 꽃이 지는데 왜 내가 아픈지』, 문예바다, 2021. 🍎 해설 세상은 사람이 있어 아름답다. 살구꽃처럼 만나 단풍잎처럼 헤어지더라도 사람사이에 사랑이 있기에 세..

좋은시 2023.11.14

김남조 가고 오지 않는 사람

김남조 가고 오지 않는 사람. 두 사람간의 사랑 무게의 저울이 좀 기울어지면 어떤가. 가고 오지 않는 사람 /김남조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려 줍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부끄러워 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 없습니다. 요행이 그 능력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많이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 됩시다 🍒 ❄출처 : 김남조 시집, 『김남조 시전집』, 국학자료원, 2005. 🍎 해설 사람과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한국 현대시의 지평을 넓힌 김남조 시인이 금년 10월에 별세했다(향년 96세). 여성 시단의 최고 원로이자, 1,000여 편의 시를 쓰며 펜을 놓지 않았던 영원한 현역. 시인은 ‘사랑’의 가치를 역설하는 작품으로 차갑게 식..

좋은시 2023.11.13

박치성 봄이에게

박치성 봄이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아름다운 시.봄이에게/박치성민들레가 어디서든 잘 자랄 수 있는 건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는 바람에 기꺼이 몸을 실을 수 있는 용기가 있기 때문이겠지 어디서든 예쁜 민들레를 피어낼 수 있는 건 좋은 땅에 닿을거라는 희망을 품었고 바람에서의 여행도 즐길수 있는 긍정을 가졌기 때문일거야 아직은 작은 씨앗이기에 그리 조급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리 불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넌 머지않아 예쁜 꽃이 될테니까 🍒 ❄출처 : 박치성 시집, 『널 만난 후, 봄』, 부크크(bookk), 2016. 🍎 해설희망과 용기를 주는 아름다운 시다. 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날리고 날리어 어느 낯선 땅에 이르게 될지라도, 긍정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날 것이라는 확신을 ..

좋은시 2023.11.09

정끝별 사막거북

정끝별 사막거북. 사막거북의 생존전략에서 배운다. 사막거북 /정끝별 사막에서 물을 잃는 건 치명적인 일이다 가물에 콩 나듯 사막에서 만나는 풀이나 선인장에게 병아리 눈물만큼의 물을 얻어 몸속에 모았다가 위험에 빠지면 그마저도 다 버린다 살기 위해 배수진을 치는 것이다 나도 슬픔에 빠지면 몸속에 모았던 물을 다 비워낸다 쏟아내고서야 살아남았던 진화의 습관이다 어떤 것은 버렸을 때만 가질 수 있고 어떤 것은 비워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쏟아내고서야 단단해지는 것들의 다른 이름은? 돌처럼 단단해진 두 발을 본 적이 있다 피딱지가 엉겨 있었다 어느 거리였을까 어느 밥벌이 전쟁터였을까 🍒 ❄출처 : 정끝별 시집, 『모래는 뭐래』, 창비, 2023. 🍎 해설 사막거북은 극한 상황에 대비해 몸속에 물을 저장한다. 하..

좋은시 2023.11.08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