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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697

나태주 좋은 시 세상일이 하도 섭해서

나태주 좋은 시 세상일이 하도 섭해서. 세상일이 하도 섭한 날이 없었습니까? 세상일이 하도 섭해서 /나태주 세상일이 하도 섭해서 그리고 억울해서 세상의 반대쪽으로 돌아앉고 싶은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어 버리기라도 하고 싶은 날 내게 있었소 아무 한테서도 잊혀지고 싶은 날 그리하여 소리내어 울고 싶은날 참 내게는 많이 있었소 🍒 ❄출처 : 나태주 시집, 『나의 등불도 애닯다』, 토우, 2000. 🍎 해설 날마다 출근하면 녹음기처럼 되풀이되는 상사의 역겨운 잔소리는 참을만 하다. 자존심을 있는대로 구기면서 거래처에 간곡한 목소리로 전화를 거는 일도 참을만 하다. 그러나 욱박지르고 고함치고 다그치고 야단치고 사표를 써 오라,집에 가서 애나 보라라는 말을 하루에 몇 번씩 듣는 날이 있다. 실제로 억울해서 세..

좋은시 2022.09.27

이해인 좋은 시 단풍나무 아래서

이해인 좋은 시 단풍나무 아래서. 사랑하는 이를 보고 싶으면 단풍나무 아래로 오세요. 단풍나무 아래서 /이해인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다 문득 그가 보고 싶을 적엔 단풍나무 아래로 오세요 마음속에 가득 찬 말들이 잘 표현되지 않아 안타까울 때도 단풍나무 아래로 오세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세상과 사람을 향한 그리움이 저절로 기도가 되는 단풍나무 아래서 하늘을 보면 행복합니다 별을 닮은 단풍잎들이 황홀한 웃음에 취해 나의 남은 세월 모두가 사랑으로 물드는 기쁨이여 🍒 ❄출처 : 이해인 시집, 『희망은 깨어있네』, 마음산책, 2010. 🍎 이해인 시인의 자작시 해설 반년 이상 하복인 흰 수도복을 입다가 검은 수도복으로 갈아입는 11월이 저는 참 좋습니다. 김현승 시인이 ‘빛을 넘어 빛에 닿은 단 하나의 빛’이..

좋은시 2022.09.26

강인호 좋은 시 가을에는

강인호 좋은 시 가을에는. 가을에게 자꾸만 내가 부끄러워진다. 가을에는 /강인호 물소리 맑아지는 가을에는 달빛이 깊어지는 가을에는 하늘이 높아지는 가을에는 쑥부쟁이 꽃피는 가을에는 어인 일인지 부끄러워진다 딱히 죄지은 것도 없는데 아무런 이유 없이 가을에게 자꾸만 내가 부끄러워진다 🍒 ❄출처 : 강인호 시집, 『비 묻어 온 바람』,문학정신, 2003. 🍎 해설 가을은 흔히 수확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많은 상념에 젖게 만드는 계절이다. 유리알처럼 파랗게 갠 높아지는 가을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까닭없이 좀 서글퍼진다. 들에 핀 하찮은 들국화인 쑥부쟁이도 가을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고 있는데, 나는 봄 여름동안 띵까띵까 무엇을 했단 말인가? 아무런 이유없이 가을에게 자꾸만 내가 부끄러워 진다. 가을..

좋은시 2022.09.23

이성선 좋은 시 가을 편지

이성선 좋은 시 가을 편지. 가을 벤치에 한번 앉아 보세요. 가을 편지 /이성선 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고지 처럼 하늘이 한 칸씩 비워가고 있습니다 그 빈곳에 맑은 영혼의 잉크물로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랑함으로 오히려 아무런 말 못하고 돌려보낸 어제 다시 이르려해도 그르칠까 차마 또 말 못한 오늘 가슴에 고인 말을 이 깊은 시간 한 칸씩 비어가는 하늘 백지에 적어 당신에게 전해달라 나무에게 줍니다 🍒 ❄출처 : 나태주, 송수권, 이성선 지음, 『별 아래 잠든 시인』,문학사상,2001. 🍎 해설 가을 벤치에 앉으면 나뭇잎이 하나 둘씩 떨어지는 모습이 보인다. 떨어지는 나뭇잎 사이로 빈 곳에 파란 가을 하늘이 조금씩 보인다. 그 벤치에 앉아 한 칸씩 비어가는 푸른 가을 하늘 백지에 그리운 사람에..

좋은시 2022.09.22

오장환 좋은 시 나의 노래

오장환 좋은 시 나의 노래. 일제에 대한 대표적인 저항시 중 하나다. 나의 노래 /오장환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가슴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새로운 묘에는 옛 흙이 향그러 단 한번 나는 울지도 않었다. 새야 새 중에도 종다리야 화살같이 날라가거라 나의 슬픔은 오직 님을 향하야 나의 과녁은 오직 님을 향하야 단 한번 기꺼운 적도 없었더란다. 슬피 바래는 마음만이 그를 좇아 내 노래는 벗과 함께 느끼었노라.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무덤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 ❄출처 : 원시, 오장환 시집, 『헌사』,남만서방,1939. 『오장환 전집 1』창비, 1989. ​🍎 해설 '이 시는 일제 강점기 시대의 3대 천재시인(서정주, 오장환, 이용악)으로 알려진 오장환 시인의 시다.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

좋은시 2022.09.20

정채봉 좋은 시 첫길 들기

정채봉 좋은 시 첫길 들기. 인생의 좌우명이 되는 마음에 남는 시다. 첫길 들기 /정채봉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먼저 창을 열고 푸른 하늘빛으로 눈을 씻는다. 새 신발을 사면 교회나 사찰 가는 길에 첫 발자국을 찍는다. 새 호출기나 전화의 녹음은 웃음소리로 시작한다. 새 볼펜의 첫 낙서는 ‘사랑하는’이라는 글 다음에 자기 이름을 써본다. 새 안경을 처음 쓰고는 꽃과 오랫동안 눈맞춤을 한다. 🍒 ❄출처 : 정채봉 시집,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샘터, 2020. 🍎 해설 시인은 ‘처음’의 그 순수함, 그 열정. 이런 것들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눈 뜨고 가장 먼저 푸른 하늘빛을 보고, 새 신발은 교회 가는 길에 첫 발자국을 찍고 새 볼펜으로 스스로에게 사랑..

좋은시 2022.09.14

이문재 좋은 시 오래된 기도

이문재 좋은 시 오래된 기도. 교회나 사찰에 가서 하는 기도만 기도가 아니다. 오래된 기도 /이문재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 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

좋은시 2022.09.13

나태주 좋은 시 가을 서한 1

나태주 좋은 시 가을 서한 1. 내일 아침엔 바바리코트를 입고 출근하시라. 가을 서한 1 /나태주 1 끝내 빈 손 들고 돌아온 가을아, 종이기러기 한 마리 안 날아오는 비인 가을아, 내 마음까지 모두 주어버리고 난 지금 나는 또 그대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까 몰라. 2 새로 국화잎새 따다 수놓아 새로 창호지문 바르고 나면 방안 구석구석까지 밀려들어오는 저승의 햇살.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만의 겨울양식. 3 다시는 더 생각하지 않겠다, 다짐하고 내려오는 등성이에서 돌아보니 타닥타닥 영그는 가을꽃씨 몇 옴큼, 바람 속에 흩어지는 산 너머 기적 소리. 4 가을은 가고 남은 건 바바리코우트 자락에 날리는 바람 때묻은 와이셔츠 깃. 가을은 가고 남은 건 그대 만나러 가는 골목길에서의 내 휘파람 소리. 첫눈 내리는 날..

좋은시 2022.09.12

김재진 좋은 시 토닥토닥

김재진 좋은 시 토닥토닥. 내 안의 내가 삶이 아프다고 말할 때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토닥토닥 /김재진 나는 너를 토닥거리고 너는 나를 토닥거린다. 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하고 너는 자꾸 괜찮다고 말한다. 바람이 불어도 괜찮다. 혼자 있어도 괜찮다. 너는 자꾸 토닥거린다. 나도 자꾸 토닥거린다. 다 지나간다고 다 지나갈 거라고 토닥거리다가 잠든다. 🍒 ❄출처 : 김재진 시집, 『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할 때』,꿈꾸는 서재,2015. 🍎 해설 내 안의 진짜 내가 삶이 아프다고 말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는가? “다 잘 될거야.”가 아닐 것이다. “다 지나간다고, 다 지나갈 거라고.” 내 안의 내가 나를 토닥여 주는 이 말처럼 위안을 주는 말은 없었던 것 같다. 시인은 저마다 인생의 무게를 지고 삶의 길을..

좋은시 2022.09.10

문정희 좋은 시 추석달을 보며

문정희 좋은 시 추석달을 보며. 추석이다. 헤어져 그리운 얼굴들 곁으로. 추석달을 보며 /문정희 그대 안에는 아무래도 옛날 우리 어머니가 장독대에 떠놓았던 정한수 속의 그 맑은 신이 살고 있나 보다 지난 여름 모진 홍수와 지난 봄의 온갖 가시덤불 속에서도 솔 향내 푸르게 배인 송편으로 떠올랐구나 사발마다 가득히 채운 향기 손바닥이 닳도록 빌고 또 빌던 말씀 참으로 옥양목같이 희고 맑은 우리들의 살결로 살아났구나. 모든 산맥이 조용히 힘줄을 세우는 오늘은 한가윗날 헤어져 그리운 얼굴들 곁으로 가을처럼 곱게 다가서고 싶다 가혹한 짐승의 소리로 녹슨 양철처럼 구겨 버린 북쪽의 달, 남쪽의 달 이제는 제발 크고 둥근 하나로 띄워 놓고 나의 추석달은 백동전같이 눈부신 이마를 번쩍이며 밤 깊도록 그리운 얘기를 나누..

좋은시 2022.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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