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2024/01 33

이재무 낙엽

이재무 낙엽. 낙엽의 깊은 뜻. 낙엽 /이 재 무 시를 지망하는 학생이 보내온 시 한 편이 나를 울린다 세 행 짜리 짧은 시가 오늘 밤 나를 잠 못 이루게 한다 “한 가지에 나고 자라는 동안 만나지 못하더니 낙엽 되어 비로소 바닥에 한 몸으로 포개져 있다” 그렇구나 우리 지척에 살면서도 전화로만 안부 챙기고 만나지 못하다가 누군가의 부음이 오고 경황 중에 달려가서야 만나는구나 잠시잠깐 쓸쓸히 그렇게 만나는구나 죽음만이 떨어져 멀어진 얼굴들 불러모으는구나 🍒 ❄출처 : 이재무 시집, 『푸른고집 』, 천년의 시작, 2004. 🍎 해설 이 시의 방아쇠는 3행짜리 짧은 시다. “한 가지에 나고 자라는 동안 만나지 못하더니 낙엽 되어 비로소 바닥에 한 몸으로 포개져 있다” 문상을 가 보면 죽음은 낙엽과 같아서 떨..

좋은시 2024.01.21

나태주 끝끝내

나태주 끝끝내. 나는 너를 사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끝끝내 /나태주 너의 얼굴 바라봄이 반가움이다 너의 목소리 들음이 고마움이다 너의 눈빛 스침이 끝내 기쁨이다 끝끝내 너의 숨소리 듣고 네 옆에 내가 있음이 그냥 행복이다 이세상 네가 살아있음이 나의 살아있음이고 존재이유다. 🍒 ❄출처 : 나태주 시집, 『끝끝내』, 지혜, 2017. 🍎 해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I think; therefore I am.)"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이 시는 “나는 너를 사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I love you; therefore I am.)”이다. 사랑은 만물의 창조주이며, 사랑은 만물을 성장시키는 힘이다. 사랑을 얻으면 이 세상의 전부를 얻는 것이다. 결..

좋은시 2024.01.20

반칠환 딱따구리

반칠환 딱따구리. 재미있는 시.딱따구리/반칠환곡괭일 쓰니 블루칼라 같지만 머리를 쓰니 화이트칼라두 된다우 딱, 딱, 딱- 곡괭이질 하나로 너끈히 장가도 가고 알도 품을 수 있다우 🍒 ❄출처 : 반칠환 시집, 『웃음의 힘』, 지혜, 2012. 🍎 해설반칠환 시인은 짧은 시의 창작을 시도하고 있다. 독자들과 간명하게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시인의 자세는 감동적이다. 짧지만 긴 여운, 의표를 찌르는 해학과 통찰의 시편들은 인터넷 시대에 시가 어떻게 사람들의 가슴에 스밀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문학적 소통의 시금석이자 내비게이션이다. 재치문답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시 언어의 경제성과 삶을 관통하는 통찰이 짧은 시에 서정적으로 압축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반칠환의 짧은 시는 모순이 많은 오늘의 세태를 촌철의 시어들로 꼬..

짧은 시 2024.01.19

투르게네프 명시 거지

투르게네프 명시 거지. 적선한 자도 적선을 받는다.거지/ 투르게네프길거리를 걷고 있었다. 늙은 거지 한 사람이 나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눈물어린 붉은 눈, 파리한 입술, 다 해진 누더기 옷, 더러운 상처…… 아아, 가난이란 어쩌면 이다지도 잔인하게 이 불행한 사람을 갉아먹는 것일까! 그는 빨갛게 부풀은 더러운 손을 나에게 내밀었다. 그는 신음하듯 중얼거리듯 동냥을 청했다. 나는 호주머니란 호주머니를 모조리 뒤져 보았다…… 지갑도 없고 시계도 없고 손수건마저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외출을 했던 것이다. ‘이를 어쩌나……' 그러나 거지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그 손은 힘없이 흔들리며 떨고 있었다.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 몰라, 나는 힘없이 떨고 있는 거지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미안하..

세계 명시 2024.01.18

이하석 물잠자리

이하석 물잠자리. 반전의 매력이있는 짧은 시.물잠자리/이하석물잠자리가 어느 풀에 어느 나무에 어느 돌에 어느 물이랑 깊은 곳에 잘 앉는지 소풍 가서 혼자 밥 먹으며 유심히 봅니다 당신은 또, 무심히 날 잊었지요? 🍒 ❄출처 : 이하석 시집, 『부서진 활주로』,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 해설총 59자로 구성돼 있는 이 짧은 시에는 기승전결의 논리가 있다. 마지막에 사실은 물잠자리를 본 것이 아니라 줄곧 보고 싶은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반전의 매력이 있다. 뒤집어지는 전복의 미학과 번뜩임의 섬광 사이에 통찰과 서정의 뿌리를 그대로 응축하고 있다. 시는 어렵고 고상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시를 생활 속에서 쉽고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것으로 느끼게 함으로써 시의 대중성을 높이려는 시도는 높이 평가할만..

짧은 시 2024.01.17

김소월 접동새

김소월 접동새. 우리 민족의 한의 정서를 노래한 명시.접동새/김소월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웁이나 남아되던 오랩동생을 죽어서도 못잊어 차마 못잊어 야삼경夜三更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 ❄출처 : 1923년 『배재(培材)』2호에 「접동」이란 제목으로 발표, 김소월, 『김소월 시집』, 종합출판범우, 2011. 🍎 해설*접동새: 두견새 *‘아우래비’: ‘아홉 오라비’의 의미와 접동새의 울음을 의성화. *불설워: 몹시 서러워의 평안도 사투리. ..

이상 거울

이상 거울. 이상 시인의 시 중 가장 쉬운 시.거울/이상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 ❄출처 : [가톨릭청년](1933. 10)에 첫 발표, 이상 시집, 『이상 시전집』, 권영민 엮음, 민음사, 2022. 🍎 해설난해시로 유명한 이상 시인의 시 중에서 가장 쉬운 시 중 하나다. 가장 쉬운 시인데도 그렇게 ..

이영광 1월 1일

이영광 1월 1일. 새해에는 거창한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된다. 1월 1일 /이영광 새해가 왔다 1월 1일이 왔다 모든 날의 어미로 왔다 등에 해를 업고, 해 속에 삼백예순네 개 알을 품고 왔다 먼 곳을 걸었다고 몸을 풀고 싶다고 환하게 웃으며 왔다 어제 떠난 사람의 혼령 같은 새 사람이 왔다 삼백예순다섯 사람이 들이닥쳤다 얼굴은 차차 익혀나가기로 하고 다 들이었다 같이 살기로 했다 무얼 머뭇거리느냐고 빈집이 굶주린 귀신처럼 속삭여서였다 🍒 ❄출처 : 이영광 시집, 『끝없는 사람』, 문학과지성사, 2018. 🍎 해설 1월 1일이 삼백예순네 개의 알을 품고 먼 길을 걸어왔다. 그 알을 무심히 깨트릴 수는 없다. 삼백예순 개의 나날을 알처럼 아끼고 소중하게 보내야 한다. 삼백예순다섯 사람이 들이닥쳤다. 새 ..

좋은시 2024.01.14

이성복 슬퍼할 수 없는 것

이성복 슬퍼할 수 없는 것. 나 없이 눈은 녹고 나 없이 봄은 온다. 슬퍼할 수 없는 것 /이성복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눈이 쌓여 있다는 것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끝내 못 가리라는 것 나 없이 눈은 녹고 나 없이 봄은 오리라는 것 슬퍼할 수 없는 것, 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 🍒 ❄출처 : 이성복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 문학과지성사, 2003. 🍎 해설 누구에게나 슬퍼할 수 없고, 슬퍼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 온다. 풍뎅이가 한 번 엎어지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일어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소리치고 싶어도 말이 나오지 않는 슬픈 상황, 입이 있어도 그 입이 아무 소용 없는 그런 슬픔이다.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 슬퍼할 수 없..

짧은 시 2024.01.13

안도현 옆모습

안도현 옆모습.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의 옆모습을 보면서 살고 있습니까? 옆모습 /안도현 나무는 나무하고 서로 마주보지 않으며 등 돌리고 밤새 우는 법도 없다 나무는 사랑하면 그냥, 옆모습만 보여준다 옆모습이란 말, 얼마나 좋아 옆모습, 옆모습, 자꾸 말하다 보면 옆구리가 시큰거리잖아 앞모습과 뒷모습이 그렇게 반반씩 들어앉아 있는 거 당신하고 나하고는 옆모습만 단 하루라도 오랫동안 바라보자 사나흘이라도 바라보자 🍒 ❄출처 : 안도현 시집,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창비, 2004. 🍎 해설 사람은 앞모습을 보고 만난다. 그런데 앞모습만 바라보고 살다가 가끔은 권태와 갈등과 균열의 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사랑하던 사람에게서 등을 돌리고 뒷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나무는 나무에게 일생 동안 그저 옆..

좋은시 2024.01.12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