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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639

박경리 옛날의 그 집

박경리 옛날의 그 집. 토지 박경리 작가가 남긴 마지막 시. 옛날의 그 집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

좋은시 2024.02.27

황지우 거룩한 식사

황지우 거룩한 식사. 그 어떤 것도 밥 다음이다.거룩한 식사/황지우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을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 ❄출처 : 황지우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지성사, 1998. 🍎 해설춘궁기라는 절대빈곤의 시대.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 식은 밥을 ..

좋은시 2024.02.26

신경림 앞이 안 보여 지팡이로 더듬거리며

신경림 앞이 안보여 지팡이로 더듬거리며. 판자 다리를 위태롭게 건너고 있는 것이 인생. 앞이 안보여 지팡이로 더듬거리며 /신경림 앞 못 보는 사람이 개울을 건너고 있다. 지팡이로 판자 다리를 더듬으며 빠질 듯 빠질 듯 위태롭게 개울을 건너고 있다. 나는 손에 땀을 쥔다 가슴이 죈다 꿈속에서처럼 가위 눌려 소리도 지르지 못한다. 그러다 문득 나는 개울을 건너고 있는 것이 그가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안다. 앞이 안보여 지팡이로 더듬거리며 빠질 듯 빠질 듯 위태롭게 개울을 건너고 있는 것이 우리들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안다. 사람들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안타깝게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그 앞을. 🍒 ❄출처 : 신경림 시집,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1993. 🍎 해설 이 시에는 우선 반전의 ..

좋은시 2024.02.25

이기철 이향

이기철 이향. 인간의 원천적 그리움인 향수. 이향(離鄕) /이기철 제대를 하고 대학을 졸업하면 나는 개나리꽃이 한 닷새 마을의 봄을 앞당기는 산란초 뿌리 풀리는 조그만 시골에서 시나 쓰는 가난한 서생이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고급 장교가 되어 있는 국민학교 동창과 개인회사 중역이 되어 있는 어릴 적 친구들이 모두 마을을 떠날 때 나는 혼자 다시 이 마을로 돌아와 탱자나무 울타리를 손질하는 초부가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눈 속에서 지난해 지워진 쓴냉이 잎새가 새로 돋고 물레방앗간 뒷쪽에 비비새가 와서 울면 간호원을 하러 독일로 떠난 여자 친구의 항공엽서나 기다리며 느린 하학종을 울리는 낙엽송 교정에서 잠처럼 조용한 풍금소리를 듣는 2급 정교사가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시간은 물처럼 흘러갔..

좋은시 2024.02.24

고현혜 집으로

고현혜 집으로. 밖에서 헤매지말고 집으로 돌아가세요. 집으로 /고현혜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세요. 그대 집에 죽어가는 화초에 물을 주고 냉기 가득한 그대 부엌 큰솥을 꺼내 국을 끓이세요. 어디선가 지쳐 돌아올 아이들에게 언제나 꽃이 피어 있는 따뜻한 국이 끓는 그대 집 문을 열어주세요. 문득 지나다 들르는 외로운 사람들에게 당신 사랑으로 끓인 국 한 그릇 떠주세요. 그리고 지금 당신 곁에 있는 사람 목숨 바쳐 사랑하세요. 🍒 ❄출처 : 고현혜 시집, 『나는 나의 어머니가 되어』, 푸른사상, 2015. 🍎 해설 때때로 우리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잊고 살기도 한다. 자기 집의 소중함, 배우자의 소중함을 잊고 살기도 한다. 시인은 밖에서 방황하지 말고 화초가 싱싱하게 되살아나고, 부엌에는 온기가..

좋은시 2024.02.23

신현정 모자

신현정 모자. 모자를 쓰면 여행을 간 기분이다. 모자 /신현정 나는 분명히 모자를 쓰고 있는데 사람들은 알아보지를 못한다 그것도 공작 깃털이 달린 것인데 말이다 아무려나 나는 모자를 썼다 레스토랑으로 밥 먹으러 가서도 모자를 쓰고 먹고 극장에서도 모자를 쓰고 영화를 보고 미술관에서도 모자를 쓰고 그림을 감상한다 나는 모자를 쓰고 콧수염에 나비넥타이까지 했다 모자를 썼으므로 난 어딜 조금 가도 그걸 여행이거니 한다 나는 절대로 모자를 벗지 않으련다 이제부터는 인사를 할 때도 모자를 쓰고 하리라. 🍒 ❄출처 : 신현정 시집, 『난쟁이와 저녁식사를』, 호북인민출판사, 2009. 🍎 해설 모자를 쓰면 어디에 조금 가도 먼 데 가는 것 같다. 여행하는 때처럼 재미가 있다. 공작 깃털이 달린 모자를 쓰고 콧수염에 ..

좋은시 2024.02.21

박노해 도토리 두 알

박노해 도토리 두 알. 도토리 키재기. 훌륭한 참나무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도토리 두 알 /박노해 산길에서 주워든 도토리 두 알 한 알은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 한 알은 크고 윤나는 도토리 나는 손바닥의 도토리 두 알을 바라본다 너희도 필사적으로 경쟁했는가 내가 더 크고 더 빛나는 존재라고 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싸웠는가 진정 무엇이 더 중요한가 크고 윤나는 도토리가 되는 것은 청설모나 멧돼지에게나 중요한 일 삶에서 훨씬 더 중요한 건 참나무가 되는 것 나는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를 멀리 빈숲으로 힘껏 던져주었다 울지 마라, 너는 묻혀서 참나무가 되리니 🍒 ❄출처 : 박노해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느린걸음, 2010. 🍎 해설 산길에서 주워든 도토리 두 알." '크고 윤나는..

좋은시 2024.02.20

장석남 배를 매며

장석남 배를 매며. 사랑이란 우연히 던져지는 밧줄을 받아 배를 매게 되는 것. 배를 매며 /장석남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 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 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할 수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 ❄출처 : 장석남 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창작과비평사, 2000. 🍎 해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좋은시 2024.02.16

유자효 아직

유자효 아직. 사랑은 함빡 주어야 한다. 아직 /유자효 너에게 내 사랑을 함빡 주지 못했으니 너는 아직 내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내 사랑을 너에게 함빡 주는 것이다 보라 새 한 마리, 꽃 한 송이도 그들의 사랑을 함빡 주고 가지 않느냐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그들의 사랑이 소진됐을 때 재처럼 사그라져 사라지는 것이다 아직은 아니다 너는 내 사랑을 함빡 받지 못했으니 🍒 ❄출처 : 유자효 시집, 『아직』, 시학, 2014. 🍎 해설 사랑에는 총량이 있을 법하다. 시인은 사랑을 할 때 함빡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뭔가 미진한 게 남아 있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가슴에 저장되어 있는 사랑의 총량을 다 소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랑의 불을 다 써서 없애기 전까..

좋은시 2024.02.15

김광섭 소망

김광섭 소망. 나는 어떤 소망을 품어야 할까?소망/김광섭비가 멎기를 기다려 바람이 자기를 기다려 해를 보는 거예요 푸른 하늘이 얼마나 넓은가는 시로써 재며 사는 거예요 밤에 뜨는 별은 바다 깊이를 아는 가슴으로 헤는 거예요 젊어서 크던 희망이 줄어서 착실하게 작은 소망이 되는 것이 고이 늙는 법이에요 🍒 ❄출처 : 김광섭 시집, 『성북동 비들기』, 민음사, 1975. 🍎 해설누구나 소망을 품는다. 무엇을 소망하든 각자의 자유다. 그러나 시인은 소망에서 두 가지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먼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다. 비가 멎고 바람이 자기를 기다려 해를 보자고 한다. 푸른 하늘의 무한한 넓이는 맘껏 상상하는 시의 언어를 빌려 계측하고, 밤에 높게 뜬 별은 바다 깊이를 이해하는 이의 마음으..

좋은시 2024.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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