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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697

김사인 지상의 방 한 칸

김사인 지상의 방 한 칸. 생활고 얘기가 아니다. 삶의 성찰이 있다. 지상의 방 한 칸 /김사인 세상은 또 한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 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 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비는 재주 뿐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어리 초라한 몸 가릴 방 한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 밖에는 바람소리 사정 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 ❄출처 : 김사인 시집, 『밤에 쓰는 편지』, 문학동네, 2020. 🍎 해설..

좋은시 2023.06.23

마종기 우화의 강

마종기 우화의 강. 사람을 만나고 좋아하는 일은 죽고 사는 일보다 더 무겁고 소중한 일이다. 우화의 강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이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

좋은시 2023.06.21

이해인 꽃멀미

이해인 꽃멀미.당신은 향기가 있는 사람입니까? 꽃멀미 /이해인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면 말에 취해서 멀미가 나고, 꽃들을 너무 많이 대하면 향기에 취해서 멀미가 나지. 살아 있는 것은 아픈 것, 아름다운 것은 어지러운 것. 너무 많아도 싫지 않은 꽃을 보면서 나는 더욱 사람들을 사랑하기 시작하지. 사람들에게도 꽃처럼 향기가 있다는 걸 새롭게 배우기 시작하지. 🍒 ❄출처 : 이해인 시집, 『꽃은 흩어지고 그리움은 모이고』, 분도출판사, 2004. 🍎 해설 꽃처럼 향기가 나는 사람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기심을 버리고 얼마나 아파해야 할지...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해야 할지... 또한 주위 사람들 안에 숨어 있는 향기를 발견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해야 할지... 살아 있는 것은 아픈 것, 아름다운 것은 ..

좋은시 2023.06.18

함민복 봄꽃

함민복 봄꽃. 봄꽃의 꽃침을 맞아보자. 봄꽃 /함민복 꽃에게로 다가가면 부드러움에 찔려 삐거나 부은 마음 금세 환해지고 선해지니 봄엔 아무 꽃침이라도 맞고 볼 일 ❄출처 : 함민복 시집, 『말랑말랑한 힘』, 문학세계사, 2012. 🍎 해설 누구나 꽃 앞에서는 다투지 않고 마음이 밝아진다. 꽃침을 한번 맞아보자. 꽃침을 맞는다는 시적 에스프리가 감동적이다. 마음이 삐거나 부은 도시 문명인들이여! 봄꽃의 꽃침을 맞고 마음이 환해지고 선해져서 다른 사람을 포용하며 남을 감싸 안을 줄도 아는 그렇게 “부드럽게 살라.” 꽃에게로 다가가면 부드러움에 찔려 삐거나 부은 마음 금세 환해지고 선해지니 봄엔 아무 꽃침이라도 맞고 볼 일

좋은시 2023.06.14

도종환 쓸쓸한 세상

도종환 쓸쓸한 세상. 사람들은 쓸쓸하고 쓸쓸하여 사랑을 한다. 당신은? 쓸쓸한 세상 /도종환 이 세상이 쓸쓸하여 들판에 꽃이 핍니다 하늘도 허전하여 허공에 새들을 날립니다 이 세상이 쓸쓸하여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유리창에 썼다간 지우고 허전하고 허전하여 뜰에 나와 노래를 부릅니다 산다는 게 생각할수록 슬픈 일이어서 파도는 그치지 않고 제 몸을 몰아다가 바위에 던지고 천 권의 책을 읽어도 쓸쓸한 일에서 벗어날 수 없어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글 한 줄을 씁니다 사람들도 쓸쓸하고 쓸쓸하여 사랑을 하고 이 세상 가득 그대를 향해 눈이 내립니다. 🍒 ❄출처 : 도종환 시집, 『슬픔의 뿌리』, 실천문학사, 2005. 🍎 해설 쓸쓸함이란 인간 누구나 평생 안고가야하는 숙제이다. 아플 걸 빤히 알면서도 사람들은 쓸쓸..

좋은시 2023.06.09

모윤숙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모윤숙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오늘은 현충일이다. 이 시와 함께 호국영령을 기리자.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모윤숙 -나는 광주(廣州) 산곡(山谷)을 헤매다가 문득 혼자 죽어 넘어진 국군을 만났다. ---------------------------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런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나는 죽었노라, 스물 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좋은시 2023.06.06

도종환 여백

도종환 여백. 당신은 여백이 있는 사람인가요? 여백 /도종환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 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 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히 쓰다듬어 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 ❄출처 : 도종환 시집, 『슬픔의 뿌리』, 실천문학사, 2005. 🍎 해설 이 시에서는 인생을 걸어가는 자세를 두 부류로 본 것 같다. 여백이 있느냐, 없느냐는 것. 자신과 타인에 적..

좋은시 2023.06.05

목필균 6월의 달력

목필균 6월의 달력. 한 해 허리가 접히는 이번 6월에는... 6월의 달력 /목필균 한 해 허리가 접힌다 계절의 반도 접힌다 중년의 반도 접힌다 마음도 굵게 접힌다 동행 길에도 접히는 마음이 있는 걸 헤어짐의 길목마다 피어나던 하얀 꽃 따가운 햇살이 등에 꽂힌다 🍒 ❄출처 : 목필균 시집, 『내게 말 걸어 주는 사람들』, 시선사, 2021. 🍎 해설 6월 달력을 넘긴지 며칠 되지 않았다. 한 해 허리가 접히고 계절의 반도 접히고 중년의 반도 접히고 마음도 굵게 접힌다. 한 해 허리가 접힌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이 6월에 삶의 지혜를 깨닫지는 못하더라도 남은 6개월을 보람있게 보내야지,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동행의 길에도 늘 접히는 마음이 있어, 그 접힌 주름 안의 세상엔 섭섭한 마음들이 있다..

좋은시 2023.06.04

이해인 6월의 장미

이해인 6월의 장미. 러브 레터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는 아름다운 6월의 명시. 6월의 장미 /이해인 하늘은 고요하고 땅은 향기롭고 마음은 뜨겁다 6월의 장미가 내게 말을 걸어옵니다 ​ 사소한 일로 우울할 적마다 "밝아져라" "맑아져라" 웃음을 재촉하는 장미 ​ 삶의 길에서 가장 가까운 이들이 사랑의 이름으로 무심히 찌르는 가시를 다시 가시로 찌르지 말아야 부드러운 꽃잎을 피워 낼 수 있다고 ​ 누구를 한 번씩 용서할 적마다 싱싱한 잎사귀가 돋아난다고 6월의 넝쿨장미들이 해 아래 나를 따라오며 자꾸만 말을 건네옵니다 ​ 사랑하는 이여 이 아름다운 장미의 계절에 내가 눈물 속에 피어 낸 기쁨 한 송이 받으시고 내내 행복하십시오. 🍒 ❄출처 : 이해인 시집, 『풀꽃단상』, 분도출판사, 2006. 🍎 이해인 시..

좋은시 2023.06.02

김종해 그대 앞에 봄이 있다

김종해 그대 앞에 봄이 있다. 사랑은 먼 바다로 떠나는 한 척의배다. 풍랑을 만나면... 그대 앞에 봄이 있다 /김종해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 ❄출처 : 김종해 시집, 『그대 앞에 봄이 있다』, 문학세계사, 2017. 🍎 해설 사랑의 여정에도 겨울이 있다. 싸늘하게 식을 때가 있다. 풍랑이 있을 때에는 항구에 닻을 내리고 잠시 정박하자. 바람이 멎으면 우리들 사랑의 ..

좋은시 2023.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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