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2022/02 28

나태주 좋은 시 사는 일

나태주 좋은 시 사는 일. 오늘도 하루 잘 살았다. 사는 일 /나태주 1. 오늘도 하루 잘 살았다 굽은 길은 굽게 가고 곧은 길은 곧게 가고 막판에는 나를 싣고 가기로 되어 있는 차가 제시간보다 먼저 떠나는 바람에 걷지 않아도 좋을 길을 두어 시간 땀흘리며 걷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나쁘지 아니했다 걷지 않아도 좋을 길을 걸었으므로 만나지 못할 뻔했던 싱그러운 바람도 만나고 수풀 사이 빨갛게 익은 멍석딸기도 만나고 해 저문 개울가 고기비늘 찍으러 온 물총새 물총새, 쪽빛 나랫짓도 보았으므로 이제 날 저물려고 한다 길바닥을 떠돌던 바람도 잠잠해졌고 새들도 머리를 숲으로 돌렸다 오늘도 하루 나는 이렇게 잘 살았다 2. 세상에 나를 던져보기로 한다 한 시간이나 두 시간 퇴근버스를 놓친 날 아예 다음 차 기다리..

좋은시 2022.02.08

오세영 좋은 시 2월

오세영 좋은 시 2월. 떡국 한 그릇 먹고 났더니 2월도 벌써 1주일이 지나고 있다. 2월 /오세영 '벌써'라는 말이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새해 맞이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 지나치지 말고 오늘은 뜰의 매화 가지를 살펴보아라. 항상 비어 있던 그 자리에 어느덧 벙글고 있는 꽃, 세계는 부르는 이름 앞에서만 존재를 드러내 밝힌다. 외출을 하려다 말고 돌아와 문득 털외투를 벗는 2월은 현상이 결코 본질일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달, '벌써'라는 말이 2월만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 ❄출처 : 오세영 시집,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 시와시학사, 1992. 🍎 해설 2022년 음력 설이 엊그제다. 떡국 한 그릇 먹고 났더니 2월도 벌써 1주일이 되어 간다. 아..

좋은시 2022.02.07

이용악 좋은 시 전라도 가시내

이용악 좋은 시 전라도 가시내. 만주 북간도의 주막에서 함경도 사내가 전라도 가시내를 만났다. 전라도 가시내 /이용악 알룩조개에 입 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 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 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두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아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가 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도 외로워서 ..

좋은시 2022.02.06

장석주 수필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장석주 수필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조금만 덜 울고 조금 더 크게 웃어 주어요.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장석주 연인들이 헤어졌다고 오던 계절이 안 오거나 흐르는 경우는 없어요. 부디, 잘 살 살아요, 당신. 울 일이 있을 때 조금만 덜 울고, 웃을 일이 있을 땐 더 크게 웃어주세요. 당신은 웃는 모습이 예쁘니까요. 나는 날마다 청송사과 하나씩 깨물어 먹고, 만 보씩을 걸으며, 어떻게 살아야 세상에 작게나마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는가를 궁리하며 살겠어요. 🍒 ❄출처 : 장석주 산문집,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달, 2017. 🍎 해설 사람의 인생을 하루로 본다면 우리는 지금 몇시쯤을 살아가고 있을까? 장석주 시인은 자신의 시간을 ‘설렘과 희망으로 맥동하는 아침 시간을 보내고 난 후 ..

명작 수필 2022.02.05

허수경 좋은 시 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좋은 시 혼자 가는 먼 집. 사랑을 잃은 사람이 왜 킥킥이라는 소리를 낼까? 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좋은시 2022.02.04

이영광 좋은 시 높새바람같이는

이영광 좋은 시 높새바람같이는.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다. 높새바람같이는 /이영광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내겐 지금 높새바람같이는 잘 걷지 못하는 몸이 하나 있고, 높새바람같이는 살아지지 않는 마음이 하나 있고 문질러도 피 흐르지 않는 생이 하나 있네 이것은 재가 되어가는 파국의 용사들 여전히 전장에 버려진 짐승 같은 진심들 당신은 끝내 치유되지 않고 내 안에서 꼿꼿이 죽어가지만,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라면 내가, 자꾸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 ❄출처 : 이영광 시집, 『아픈 천국』, 창비 , 2010. 🍎 해설 '높새바람'은 동해안에서 태백산맥을 넘어 서쪽으로 부는 바람이다. 늦봄부터..

좋은시 2022.02.03

오세영 좋은 시 새해 새날은

오세영 좋은 시 새해 새날은. 새 마음 새 뜻으로 새해를 시작하자. 새해 새날은 /오세영 새해 새날은 산으로부터 온다. 눈송이를 털고 침묵으로 일어나 햇빛 앞에 선 나무, 나무는 태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해 새날은 산으로부터 온다. 긴 동면의 부리를 털고 그 완전한 정지 속에서 날개를 펴는 새 새들은 비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해 새날이 오는 길목에서 아득히 들리는 함성 그것은 빛과 밫이 부딪혀 내는 소리, 고요가 만들어 내는 가장 큰 소리, 가슴에 얼음장 깨지는 소리. 새해 새날은 산으로부터 온다. 얼어붙은 계곡에 실낱같은 물이 흐르고 숲은 일제히 빛을 향해 나뭇잎을 곧추세운다. 🍒 ❄출처 : 오세영 시집,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 시와시학사, 1992. 🍎 해설 새해 새날은 산으로부터 우..

좋은시 2022.02.02

조지훈 좋은 시 새아침에

조지훈 좋은 시 새아침에. 설날이다. 새아침에 시인과 함께 새 결심을 해 보자. 새아침에 /조지훈 모든 것이 뒤바뀌어 질서를 잃을지라도 성진(星辰)의 운행만은 변하지 않는 법도를 지니나니 또 삼백예순날이 다 가고 사람 사는 땅 위에 새해 새아침이 열려오누나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이 영겁의 둘레를 뉘라서 짐짓 한 토막 짤라 새해 첫날이라 이름 지었던가 뜻 두고 이루지 못하는 한(恨)은 태초이래로 있었나보다 다시 한 번 의욕을 불태워 스스로를 채찍질하라고 그 불퇴전(不退轉)의 결의를 위하여 새아침은 오는가 낡은 것과 새것을 의(義)와 불의(不義)를 삶과 죽음을 ㅡ 그것만을 생각하다가 또 삼백예순날은 가리라 굽이치는 산맥 위에 보랏빛 하늘이 열리듯이 출렁이는 파도 위에 이글이글 태양이 솟듯이 그렇게 열리라 ..

좋은시 2022.02.01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