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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악 좋은 시 전라도 가시내

무명시인M 2022. 2. 6.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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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악 좋은 시 전라도 가시내. Source: www. pexels. com

이용악 좋은 시 전라도 가시내. 만주 북간도의 주막에서 함경도 사내가 전라도 가시내를 만났다.

전라도 가시내

/이용악

알룩조개에 입 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 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 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두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아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가 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도 외로워서 슬퍼서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싹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 아닌 봄을 불러 줄게

손때 수줍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

 

출처 : 1939년 잡지 시학에 발표, 1947년 시집 오랑캐꽃에 수록, 이용악 시집,이용악 시전집,창비, 1995.

 

🍎 해설

이용악 시인의 이 시는 일제 강점기, 만주 북간도의 술집에서 전라도 소녀와 함경도 사내가 만난 사건을 중심으로 고향에서 추방되어 살아가는 유랑민의 민족적 비 비극을 형상화한 유명한 작품이다.

 

북간도의 술집에서 남쪽의 여자와 북쪽의 남자가 만났다. 남자는 추위에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이고, 그가 애틋한 사랑의 마음으로 보는 여자는 눈이 바다처럼 푸르까무스레한 얼굴, 술 따르는 주막 여인 전라도 가시내이다. ‘전라도 가시내는 석 달 전에 두만강을 건너 이곳 술집에 팔려온 듯하다.

 

같은 처지의 고국 여인에 대한 남자의 절절한 연민과 사랑이 표현된다. 봄을 불러줄 테니, 너의 나라로 돌아가라는 남자의 말에는 애틋한 사랑이 잘 녹아 있고,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라는 구절에는 단신으로 압록강을 건너 온 여인의 강인한 품성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 스스로는 노래도 없이’ ‘자욱도 없이사라지리라고 한다. 낯선 이국 땅의 술집에서 만난 두 사람의 동족애와 사랑은 험한 시절을 살아야 했던 우리 역사의 아펐던 시절을 서정시의 세계에서 형상화하고 있다. 명시다.

 

🌹 정끝별 시인의 해설

"거리의 뒷골목에서 만나거든/먹었느냐고 묻지 말라/굶었느냐곤 더욱 묻지 말라"('나를 만나거든')던 시인 이용악(1914~1971)! 그는 한반도의 최북단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났다. '두만강 너 우리의 강'을 건너 할아버지는 소금을 밀수입했고 친척들은 그 강을 건너 아라사(러시아) 연해주 등지로 이민을 갔다. 그 두만강을 건너 밀무역 행상 중 아버지는 객사하였으며, 홀로 된 어머니는 국숫집을 하며 어린 자식들을 키웠다. 시인 또한 서울에서 동경에서 품팔이 노동을 하며 고학했다. 이야기성과 체험의 구체성이 두드러진 그의 시들을 읽는 일은 일제강점기의 불행한 개인사, 가족사, 그리고 우리의 근·현대사를 읽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북간도 어느 술막에서 함경도 사내와 전라도 가시내가 만났다. 사내는 언 발로 눈보라를 뚫고 두만강을 건너왔으며 날이 밝으면 다시 흔적도 없이 떠나야 한다. 가시내는 석 달 전에 북으로 달리는 '불술기(기차)' 속에서 치마를 뒤집어쓴 채 이틀을 울며 두만강을 건너 이곳으로 팔려왔다. 그런 두 남녀가 국경 너머에서 만나 겨울밤 내 지나온 내력을 이야기하며 술잔을 주고받고 있다.

 

그 밤 내 사내가 '가시내야' '가시내야'라고 부를 때, 그것도 함경도 사내가 '전라도 가시내야'라고 부를 때, 그 전라도 가시내는 한없이 차고 한없이 차진 느낌이다. 고향을 떠나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고 울었던 가시내, 지금은 남실남실 술을 치는 가시내. 때로 싸늘한 웃음을 보조개를 소리 없이 새기는 가시내, 까무스레한 얼굴에 눈이 바다처럼 푸른 가시내, 간간이 전라도 사투리가 섞이는 가시내. 이 함경도 사내처럼 나는, 그 전라도 가시내를 만난 것만 같다. 전라도 개펄의 바지락 조개 같고 세발낙지 같고 때로 꿈꿈한 홍어 같기도 했으리라.

 

그 밤 내내 함경도 사내가 피워 올리는 북쪽 눈포래 냄새와, 전라도 가시내가 피워 올리는 남쪽 바다 냄새에 북간도 술막이 흥성했겠다. 그 술막의 술독 바닥났겠다. 눈에 선한, '흉참한' 시대를 살았던 그 전라도 가시내. "너의 노래가 어부의 자장가처럼 애조롭다/너는 어느 흉작촌(凶作村)이 보낸 어린 희생자냐"(제비 같은 소녀야-강 건너 주막에서)!

정끝별 시인의 언론 기고문(2008)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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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 온 함경도 사내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 아닌 봄을 불러 줄게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Source: www. pexels. 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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