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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글 1172

유하 죽도 할머니의 오징어

유하 죽도 할머니의 오징어. 명필 한석봉이 자신의 어머니 떡 쓰는 솜씨에서 깨달음을 얻었듯이.죽도 할머니의 오징어/유하오징어는 낙지와 다르게뼈가 있는 연체동물인 것을죽도에 가서 알았다온갖 비린 것들이 살아 펄떡이는어스름의 해변가한결한결 오징어 회를 치는 할머니저토록 빠르게, 자로 잰 듯 썰 수 있을까옛날 떡장수 어머니와천하 명필의 부끄러움그렇듯 어둠 속 저 할머니의 손놀림이어찌 한갓 기술일 수 있겠는가안락한 의자 환한 조명 아래나의 시는 어떤가?오징어 회를 먹으며 오랜만에 내가, 내게 던지는뼈 있는 물음 한마디 🍒 ❄출처 : 유하 시집, 『무림일기』, 문헉과지성사, 2012. 🍎 해설죽도에서 할머니가 오징어회를 능숙하게 써는 모습을 보면서 기계처럼 시를 쓰는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을 표현하고 있다. ..

좋은시 04:26:52

이영광 우물

이영광 우물. 우물이 우리를 올려다 봤다.우물/이영광우물은,동네 사람들 얼굴을 죄다 기억하고 있다 우물이 있던 자리우물이 있는 자리 나는 우물 밑에서 올려다보는 얼굴들을 죄다기억하고 있다 🍒 ❄출처 : 이영광 시집, 『나무는 간다』, 창비, 2013. 🍎 해설옛날 시골 동네에는 두레박으로 식수를 푸는 공동 우물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물을 긷기 위해 우물에 모여들었다. 우물가에서 사람들은 이웃집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교류를 했다. 우물은 사람들의 젖줄이었고, 마을의 눈동자였고. 마을 사람들의 역사였다.사람들은 물을 긷다가 문득 우물물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보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우물을 내려다본 게 아니었다. 우물이 우리를 올려다봤다. 우리의 상처와 고통과 치욕, 그리고 헌신과 ..

짧은 시 2024.11.20

안도현 꽃밭의 경계

안도현 꽃밭의 경계. 내 마음의 경계는?꽃밭의 경계 /안도현 꽃밭을 일구려고 괭이로 땅의 이마를 때리다가날 끝에 불꽃이 울던 저녁도 있었어라  꽃밭과 꽃밭 아닌 것의 경계로 삼으려고 돌을 주우러 다닐 때계곡이 나타나면 차를 세우고 공사장을 지나갈때면 목 빼고 기웃거리고 쓰러지는 남의 집 됫박만 한 주춧돌에도 눈독을 들였어라  물 댄 논에 로터리 치는 트랙터 지나갈 때 그 뒤를 겅중겅중 좇는 백로의 눈처럼 눈알을 희번덕거렸어라  꽃밭에 심을 것들을 궁리하는 일보다 꽃밭의 경계를 먼저 생각하고 돌의 크기와 모양새부터 가늠하는 내 심사가 한심하였어라  하지만 좋았어라  돌을 주워들 때의 행색이야 손바닥 붉은 장갑이지만 이 또한 꽃을 옮기는 일과도 같아서 나는 한동안 아득하기도 하였어라  그렇다면 한낱 돌덩이가..

좋은시 2024.11.19

김소월 가을 저녁에

김소월 가을 저녁에. 사랑은 인내의 미학.가을 저녁에/김소월물은 희고 길구나, 하늘 보다도. 구름은 붉구나, 해 보다도. 서럽다, 높아가는 긴 들끝에 나는 떠돌며 울며 생각한다, 그대를. 그늘 깊어 오르는 발 앞으로 끝없이 나아가는 길은 앞으로. 키높은 나무 아래로, 물마을은 성깃한 가지가지 새로 떠오른다. 그 누가 온다고 한 언약(言約)도 없건마는! 기다려 볼 사람도 없건마는! 나는 오히려 못물가를 싸고 떠돈다. 그 못물로는 놀이 잦을 때. 🍒 ❄출처 : 김소월 지음, 전문규 감수, 『진달래꽃』, 비타민북, 2023. 🍎 해설*물마을 : 강물가에 있는 마을 가을 저녁, 쓸쓸하고 외로운 때이다. 누군가 옆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일어나는 계절이다. 한 폭의 가을 수채화 속에서 한 사나이가 방황하고 있다...

좋은시 2024.11.18

김선우 SNS

김선우 SNS. 요즈음 모든 사람들이 몰두하고 있는 SNS.SNS/김선우현실의 식탁과 보여지는 식탁과 보여지고 싶은 식탁 사이품위 있게 드러내기의 기술 등급에 관하여관음과 노출 사이 수많은 가면을 가진 신체에 관하여곁에 있는 것 같지만 등을 내줄 수 없는 곁에 관하여비교가 천형인 네트에서 우울에 빠지지 않기 위해지불해야 하는 노력에 관하여 외로워서 SNS가 필요한 것인지그로 인해 개인이 더욱 외로워지는 것인지네, 간단치 않은 문제로군요 좀 더 생각해 봅니다 음모의 발명과 음지의 발굴, 심판의 욕망에 관해서도손쉽게 전시되고 빠르게 철거되는고통의 회전율에 관해서도공유하고 분노한 뒤 달아오른 속도만큼간단히 잊히는 비참의 소비 방식에 관해서도늘 새로운 이슈가 필요한 삶의 소란스러움과 궁핍에 관해서도점점 더 가벼..

좋은시 2024.11.17

류근 어쩌다 나는

류근 어쩌다 나는. 사랑시,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어쩌다 나는/류근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명랑한 햇빛 속에서도 눈물이 나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깊은 바람결 안에서도 앞섶이 마르지 않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무수한 슬픔 안에서 당신 이름 씻으며 사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가득찬 목숨 안에서 당신하나 여의며 사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삶 이토록 아무것도 아닌건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어디로든 아낌없이 소멸해 버리고 싶은건가 🍒 ❄출처 : 류근 시집, 『어떻게든 이별』, 문학과지성사, 2016. 🍎 해설류근 시인은 김광석 가수의 친구다. 그는 김광석의 유명한 노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의 작사가다. 류근 시인의 이 사랑시는 마지막 두..

좋은시 2024.11.16

백석 바다

백석 바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백석 시인.바다/백석바닷가에 왔드니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당신이 뒷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출처 : 백석 지음 고영진 편, 『정본 백석 시집』, 문학동네, 2020. 🍎 해설*구붓하고: 몸을 약간 구부리고개지꽃: 갯메꽃의 평북 방언. 바닷가 모래밭에서 자라는 넝쿨풀.개지: 깔때기 모양의 갯메꽃의 연분홍색 꽃이 끝에 피는 긴 자루.쇠리쇠리하다: 눈부시다의 평북 방언. 자신의 첫사랑인 여인이..

좋은시 2024.11.15

백석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백석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백석 시인의 소확행.내가 이렇게 외면하고/백석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 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느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꾸 들려오는 탓이다. 🍒 ❄출처 : 백석 지음, 이숭원 엮음, 『백석 시, 백편』, 태학사, 2023. 🍎 해설* 잠풍: 잔잔하게 부는 바람 달재: 달강어, 바닷물고기 진장: 진간장 이 시에서 '외면하다'의 뜻은 반어법이다. '너무 행..

좋은시 2024.11.14

곽재구 고향

곽재구 고향. 고향에 남아 묵묵히 일하는 착한 남편을 칭송.고향/곽재구흐린 새벽감나무골 오막돌집 몇 잎치자꽃 등불 켜고 산자락에 모이고깜장 구들 몇 장 서리 내린송지댁네 외양간선머슴 십 년 착한 바깥양반콩대를 다둑이며 쇠죽을 쑤고약수골 신새벽 꿈길을 출렁이며송지댁 항아리에 물 붓는 소리에헤라 나는 보지 못했네에헤라 나는 듣지 못했네손시려 송지댁 구들 곁에 쭈그린 동안선머슴 십 년 착한 바깥양반생솔 부지깽이 아내에게 넘겨주고쓱싹쓱싹 함지박이 쌀 씻는 모습쪼륵쪼륵 양은냄비에 뜨물 받는 소리에헤라 대학 나온 광주 양반에게서도에헤라 유학 마친 서울 양반에게서도나는 보지 못하였네듣지 못하였네 🍒 ❄출처 : 곽재구 시집, 『사평역에서』, 창비, 1999. 🍎 해설* 오막돌집 : ‘오두막’과 ‘돌집’을 합한 것...

좋은시 2024.11.13

곽재구 구두 한 켤레의 시

곽재구 구두 한 켤레의 시. 떠나온 고향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구두 한 켤레의 시(詩)/곽재구차례를 지내고 돌아온구두 밑바닥에고향의 저문 강물 소리가 묻어 있다.겨울 보리 파랗게 꽂힌 강둑에서살얼음판 몇 발자국 밟고 왔는데쑥골 상엿집 흰 눈 속을 넘을 때도골목 앞 보세점 흐린 불빛 아래서도찰랑찰랑 강물 소리 들린다내 귀는 얼어한 소절도 듣지 못한 강물 소리를구두 혼자 어떻게 듣고 왔을까구두는 지금 황혼뒤축의 꿈이 몇 번 수습되고지난 가을 터진 가슴의 어둠 새로누군가의 살아있는 오늘의 부끄러운 촉수가싸리 유채 꽃잎처럼 꿈틀댄다고향 텃밭의 허름한 꽃과 어둠과구두는 초면 나는 구면건성으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온 내게고향은 꽃잎 하나 바람 한 점 꾸려주지 않고영하 속을 흔들리며 떠나는 내 낡은 구두가저문 고향의 ..

좋은시 202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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