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전체 글 1199

신달자 서늘함

신달자 서늘함. 욕망이 낮고 작고 가벼워져야...서늘함/신달자주소 하나 다는 데 큰 벽이 필요없다지팡이 하나 세우는데 큰 뜰이 필요없다마음 하나 세우는 데야큰 방이 왜 필요한가언 밥 한 그릇 녹이는 사이쌀 한 톨만한 하루가 지나간다 ​❄출처 : 신달자 시집, 『북촌』, 민음사. 2016. 🍎 해설늙으면 살던 집을 좁히고, 이고 지고 끼고 살던 것을 버리고, 일을 줄인다. 작아진 몸을 눕힐 주소 하나, 낮아진 몸을 의지할 지팡이 하나, 굼뜬 몸을 일으켜 세워줄 마음 하나, 주먹만 한 위를 채워줄 언 밥 한 그릇으로 삶이 압축된다. 우리네 인간에게 찾아오는 하루는 `쌀 한 톨`과 같다. 그러나 농부에게 쌀 한 톨은 전체이다. 전부를 추수한 것과 마찬가지이니. 고통이든 행복이든 하루를 잘 살면 인생을 잘 사..

좋은시 2024.12.29

김민부 기다리는 마음

김민부 기다리는 마음. 기다림은 기다랗다.기다리는 마음/김민부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 주오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 주오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빨래 소리 물레 소리에 눈물 흘렸네 봉덕사에 종 울리면 날 불러 주오저 바다에 바람 불면 날 불러 주오기다려도 기다려도 임 오지 않고파도 소리 물새 소리에 눈물 흘렸네  ❄출처 : 김민부, 『김민부 시선』,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 해설옛날에 제주도 청년 하나가 뭍에 도착한 곳이 목포다. 청년은 제주도에 두고 온 여인을 그리며 목포 유달산 뒤 월출봉에 올랐고, 고향 여인은 간 곳 모르는 그 청년을 기다리며 매일 일출봉에 올라 육지를 바라보다가 기어이 망부석이 되고 말았다. 이 전설을 시로 만들었다. 기다림은 기다랗다. 소망이 있는 한, 기다..

좋은시 2024.12.28

이정록 저 많이 컸죠

이정록 저 많이 컸죠. 성인의 마음도 움직이는 아름다운 동시.저 많이 컸죠/이정록할머니는싱크대가 자꾸 자라는 것 같다고 합니다장롱도 키가 크는 것 같다고 허리 두드립니다 할머니 키가 작아져서 그래말하려다가 이불을 펴 드렸습니다허리가 꼬부라져서 그런거야입술을 삐죽이다가, 싱크대 찬장높은 칸에 놓인 그릇을아래 칸에 내려놓았습니다 우리 손자 많이 컸다고이제 아비만큼 자랐다고 웃습니다쓰다듬기 좋게 얼른 머리를 숙입니다 ❄출처 : 이정록 시집, 『저 많이 컸죠』, 창비, 2013. 🍎 해설자꾸만 작아지는 할머니 키를 키우는 방법을 손자는 알고 있다. 싱크대에 올려진 그릇을 할머니 손에 잘 닿도록 낮은 곳으로 옮겨 놓는다. 우리 손자 많이 컸다고 이제 아비만큼 자랐다고 웃는다. 손자는 할머니가 쓰다듬기 좋게 얼른..

좋은시 2024.12.27

김선태 옛집 마당에 꽃피다

김선태 옛집 마당에 꽃피다. 꽃은 세계를 변화시킨다.옛집 마당에 꽃피다/김선태옛집 마당을 숨어서 들여다본다 누군가 빈집을 사들여 마당에 텃밭을 가꾸었나온갖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울며 맨발로 뛰쳐나왔던 내 발자국 위에울음꽃 대신 유채꽃 고추꽃 환하다어머니 아버지 뒤엉켜 나뒹굴던 자리에도언제 그랬냐는 듯 깨꽃 메밀꽃 어우러졌다 불화의 기억 속으로 화해가 스민 것인가 가만히 귀 기울이니 식구들 웃음소리 들린다폭력의 아버지도 눈물의 어머니도뿔뿔이 흩어졌던 형제들도 모두들 돌아와마당에 꽃으로 웃고 있다 슬며시 옛집 마당에 들어가 꽃으로 서본다 ❄출처 : 김선태 시집, 『그늘의 깊이』, 문학동네. 2014. 🍎 해설어릴 때 살던 옛집을 훔쳐 본다. 그 마당에 누가 가꾸었는지 옛날의 울음꽃 대신 유채꽃, 고추..

좋은시 2024.12.26

이성복 모래내. 1978년

이성복 모래내. 1978년. 지난 날 우리 가족들의 모습.모래내 ․ 1978년 /이성복1 하늘 한 곳에서 어머니는 늘 아팠다밤 이슥하도록 전화하고 깨자마자누이는 또 전화했다 혼인(婚姻)날이 멀지 않은 거다눈 감으면 노란 꽃들이 머리 끝까지 흔들리고시간은 모래 언덕처럼 흘러내렸다아, 잤다 잠 속에서 다시 잤다보았다, 달려드는, 눈 속으로, 트럭, 거대한 무서워요 어머니―얘야, 나는 아프단다 2 이제는 먼지 앉은 기왓장에하늘색을 칠하고오늘 저녁 누이의 결혼 얘기를 듣는다꿈 속인 듯 멀리 화곡동 불빛이흔들린다 꿈 속인 듯 아득히 기적이 울고웃음 소리에 놀란 그림자 벽에 춤춘다노새야, 노새야 빨리 오렴어린 날의 내가 스물 여덟 살의 나를 끌고 간다산 넘고 물 건너 간다 노새야, 멀리 가야 해 3 거기서 너는 살..

좋은시 2024.12.25

복효근 겨울밤

복효근 겨울밤. 사무치게 맑고 긴 겨울밤.겨울밤/복효근감나무 끝에는 감알이 백서른두 개그 위엔 별이 서 말 닷 되고것들을 이부자리 속에 담아 와맑은 잠 속에내 눈은 저 숲가에 궁구는 낙엽 하나에까지도 다녀오고겨울은 고것들의 이야기까지를 다 살아도밤이 길었다 ❄출처 : 복효근 시집, 『새에 대한 반성문』, 시와시학사. 2000. 🍎 해설겨울밤은 길다. 차고 맑다. 감나무 끝에 매달린 까치밥 개수를 다 세어본다. 사무치게 맑은 겨울밤 하늘에 자루 째 풀어 놓은 별 들의 수를 세어본다. 저 숲 가에 궁그는 낙엽 하나에 까지도 다녀 온다.고것들 다 헤아리고 고것들의 이야기까지를 다 살아도 길고 긴 겨울밤. 짧고 아쉬운 여름밤에도 이런 긴 밤이 있다면... . 감나무 끝에는 감알이 백서른두 개그 위엔 별이 서 ..

좋은시 2024.12.24

손택수 가슴에 묻은 김칫국물

손택수 가슴에 묻은 김칫국물. 다른 사람과의 소통방법.가슴에 묻은 김칫국물/손택수점심으로 라면을 먹다모처럼 만에 입은흰 와이셔츠가슴팍에김칫국물이 묻었다 난처하게 그걸 잠시들여다보고 있노라니평소에 소원하던 사람이꾸벅, 인사를 하고 간다 김칫국물을 보느라숙인 고개를인사로 알았던 모양 살다보면 김칫국물이 다가슴을 들여다보게 하는구나오만하게 곧추선 머리를푹 숙이게 하는구나 사람이 좀 허술해 보이면 어떠냐가끔은 민망한 김칫국물 한두 방울쯤가슴에 슬쩍 묻혀나 볼 일이다. 🍒 ❄출처 : 『서정시학 2003년 겨울호』, 서정시학사, 2003. 🍎 해설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너무 빈틈없는 사람에게는 사람이 가질 않는다. 틈이나 빈틈이 있어야 다른 사람이 들어갈 여지가 있고,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좋은시 2024.12.23

서정주 시론

서정주 시론. 제주해녀가 제일 좋은 전복은 남겨두는 이유는?시론(詩論)/서정주바다속에서 전복따파는 濟州海女도제일좋은건 님오시는날 따다주려고물속바위에 붙은그대로 남겨둔단다. 詩의전복도 제일좋은건 거기두어라.다캐어내고 허전하여서 헤매이리요?바다에두고 바다바래여 詩人인 것을……. 🍒 ❄출처 : 서정주, 『미당 서정주 시선집(떠돌이의 시)』, 시와시학사, 2001. 🍎 해설제주해녀가 제일 좋은 전복은 임이 오는 날 임에게 주려고 따지 않고 물속바위에 붙은그대로 남겨둔단다.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남겨둘 것이 어디 시詩뿐이랴. 우리 인생도, 우리 사랑도 가장 좋은 것은 나중에 가슴조이며 즐기려고 남겨두는 게 있지 않을까? * 詩의전복도 제일좋은건 거기두어라. : 시인도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전부 말하지 ..

좋은시 2024.12.22

조정권 양파

조정권 양파. 옷을 너무 많이 껴입지는 말자.양파/조정권옷을 잔뜩 껴입고 사는 여자가모임에 나오곤 했었지어찌나 많은 옷을 껴입고 사는지비단을 걸치고도 추워하는 조그마한 중국여자 같았지 옷을 잔뜩 껴입고 사는 그 여자의 남편도모임에 가끔 나오곤 했었지남자도 어찌나 많은 옷을 껴입고 사는지나온 배가 더 튀어나온 똥똥한 중국남자 같았지그 두 사람 물에서 건지던 날옷 벗기느라 한참 걸렸다네 🍒 ❄출처 : 조정권 시집, 『떠도는 몸들』, 창비, 2005. 🍎 해설감출 것이 많은 사람은 많이 껴입어야 한다. 껴입은 그 옷의 무게 때문에 넘어지기 쉽다. 남의 말을 곧이 듣고 자기 속을 환히 드러내 보여서 손해를 보는 사람이 귀한 세상이다.그러나 나온 배가 더 튀어나온 똥똥한 중국남자처럼 너무 많은 옷을 껴입지는 ..

좋은시 2024.12.21

나태주 개울 길을 따라

나태주 개울 길을 따라. 꽃이 되고 바람이 되고 개울 길이 되어 본다.개울 길을 따라/나태주그 길에 네가 먼저 있었다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고개울물이 소리를 내고 있었고꽃이 피어 있었고꽃이 고개를 흔들고 있었고 저게 누굴까?몸을 돌렸을 때처음 보는 사람처럼낯선 얼굴 네가 너무 예뻤던 것이다그만 눈이 부셨던 것이다 그 길에서 그날 너는그냥 그대로 개울물이었고꽃이었고 또 개울물과꽃을 흔드는 바람결이었다. 🍒 ❄출처 : 나태주 시집, 『그 길에 네가 먼저 있었다』, 밥북, 2018. 🍎 해설나태주 시인의 시는 쉽고 간결하다.나태주 시인은 바람이 되었다가, 꽃이 되고, 어느 날은 새가 되어 세상을 향한 러브레터를 써 내려간다. 시어는 차분하고 간결하지만, 그 안에는 따뜻하고 진한 진심이 담겨있다. 이 시에서도..

좋은시 2024.12.2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