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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 25

이성선 북두칠성

이성선 북두칠성. 사랑하는 그녀가 마음을 열어 주지 않을 때.북두칠성/이성선누가 저 높은 나무 끝에 열쇠를 걸어 놓았나. 저녁 풀잎 사이 샛길로 몰래 가서 저 열쇠를 내려 사랑하는 사람의 방문을 열라는 것인가. 밤하늘에 그려진 저 손을 가져다가 차가운 그녀의 가슴을 열라는 것인가. 🍒 ❄출처 : 이성선 시집, 『빈 산이 젖고 있다』, 미래사, 1991. 🍎 해설그녀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녀는 좀처럼 가슴을 열어주지 않는다. 그날도 그녀를 생각하며 밤길을 걸었다. 밤 하늘을 보니 일곱 개의 북두칠성이 반짝반짝 빛난다. 보통 사람 눈에는 국자로 보이지만 북두칠성은 꼭 열쇠를 닮기도 했고 손을 닮기도 했다. 저 북두칠성이 그녀의 방문을 여는 열쇠가 되고 또 그녀의 가슴을 여는 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

짧은 시 2024.02.19

복효근 별똥별

복효근 별똥별. 당신의 자서전은 무엇인가요? 별똥별 /복효근 생生과 사死를 한 줄기 빛으로 요약해버리는 어느 별의 자서전 🍒 ❄출처 : 복효근 시집, 『꽃 아닌 것 없다』, 천년의시작, 2023. 🍎 해설 복효근 시인은 짧은 시의 창작을 시도하고 있다. 짧지만 긴 여운, 의표를 찌르는 해학과 통찰의 시편들은 인터넷 시대에 시가 어떻게 사람들의 가슴에 스밀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문학적 소통의 시금석이자 내비게이션이다. 재치문답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시 언어의 경제성과 삶을 관통하는 통찰이 짧은 시에 서정적으로 압축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짧은 시도 삶과 세계를 통찰하는 시적 직관이 잘 디자인 되어 있다. 모든 사물, 모든 생명에는 자서전이 있다. 내 삶을 뒤돌아 본다. 또 내 여생을 생각해 본다. 내 생..

짧은 시 2024.02.17

장석남 배를 매며

장석남 배를 매며. 사랑이란 우연히 던져지는 밧줄을 받아 배를 매게 되는 것. 배를 매며 /장석남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 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 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할 수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 ❄출처 : 장석남 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창작과비평사, 2000. 🍎 해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좋은시 2024.02.16

유자효 아직

유자효 아직. 사랑은 함빡 주어야 한다. 아직 /유자효 너에게 내 사랑을 함빡 주지 못했으니 너는 아직 내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내 사랑을 너에게 함빡 주는 것이다 보라 새 한 마리, 꽃 한 송이도 그들의 사랑을 함빡 주고 가지 않느냐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그들의 사랑이 소진됐을 때 재처럼 사그라져 사라지는 것이다 아직은 아니다 너는 내 사랑을 함빡 받지 못했으니 🍒 ❄출처 : 유자효 시집, 『아직』, 시학, 2014. 🍎 해설 사랑에는 총량이 있을 법하다. 시인은 사랑을 할 때 함빡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뭔가 미진한 게 남아 있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가슴에 저장되어 있는 사랑의 총량을 다 소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랑의 불을 다 써서 없애기 전까..

좋은시 2024.02.15

김광섭 소망

김광섭 소망. 나는 어떤 소망을 품어야 할까?소망/김광섭비가 멎기를 기다려 바람이 자기를 기다려 해를 보는 거예요 푸른 하늘이 얼마나 넓은가는 시로써 재며 사는 거예요 밤에 뜨는 별은 바다 깊이를 아는 가슴으로 헤는 거예요 젊어서 크던 희망이 줄어서 착실하게 작은 소망이 되는 것이 고이 늙는 법이에요 🍒 ❄출처 : 김광섭 시집, 『성북동 비들기』, 민음사, 1975. 🍎 해설누구나 소망을 품는다. 무엇을 소망하든 각자의 자유다. 그러나 시인은 소망에서 두 가지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먼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다. 비가 멎고 바람이 자기를 기다려 해를 보자고 한다. 푸른 하늘의 무한한 넓이는 맘껏 상상하는 시의 언어를 빌려 계측하고, 밤에 높게 뜬 별은 바다 깊이를 이해하는 이의 마음으..

좋은시 2024.02.14

이현승 바람 부는 저녁

이현승 바람 부는 저녁. 뒤집어지는 전복의 미학. 바람 부는 저녁 /이현승 산책로에서 갈대의 간격을 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촘촘하게 서걱이는 갈대들 눈물을 훔쳐 주기 좋은, 부대끼기 좋은, 흐느끼는 사람의 곁에서 가만히 외면하기 좋은 간격이 있다. 🍒 ❄출처 : 『서정시학 2023년 겨울호』, 서정시학, 2023. 🍎 해설 이 짧은 시에는 기승전결의 논리가 있다. 뒤집어지는 전복의 미학과 번뜩임의 섬광 사이에 통찰과 서정의 뿌리를 그대로 응축하고 있다. 이 짧은 시에 갈대의 다양한 풍경을 담았다. 갈대의 간격이 눈물을 훔쳐주기 좋은 간격이라고 하면서 흐느끼는 사람의 곁에서 가만히 외면하기 좋은 간격이 있다고 노래한다. 아름다운 전복의 미학이 있다. 시는 어렵고 고상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시를 생활 속에서..

짧은 시 2024.02.13

김상옥 어느 날

김상옥 어느 날. 사무쳤던 일도 시간과 함께 흘러간다. 어느 날 /김상옥 구두를 새로 지어 딸에게 신겨주고 저만치 가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 생애 사무치던 일도 저리 쉽게 가것네. 🍒 ❄출처 : 김상옥 시집, 『초적』, 수향서헌, 1947. 🍎 해설 아버지가 마련해준 새 구두를 신고 저만치 가는 어린 딸을 보며 지은 시다. 애들은 금방 자란다. 애타게 사무쳤던 일도 시간과 함께 흘러가고 만다. 그 모든 서러움을 세월 따라 흘려보내야 한다는 것을 아버지는 알게 된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것은 그저 지나가는 것이다. 남은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사는 일이 더 중요하다. 구두를 새로 지어 딸에게 신겨주고 저만치 가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 생애 사무치던 일도 저리 쉽게 가것네.

짧은 시 2024.02.09

한경옥 까치

한경옥 까치. 첫 눈 내린 아침. 까치의 첫 발자국. 까치 /한경옥 첫눈 내린 아침 설원에 첫 발자국 찍는다고 설레지 마라. 이미 바람과 입 맞추고 햇살과 몸 섞었다 🍒 ❄출처 : 『서정시학 2023년 겨울호』, 서정시학, 2023. 🍎 해설 이 짧은 시에는 기승전결의 논리가 있다. 뒤집어지는 전복의 미학과 번뜩임의 섬광 사이에 통찰과 서정의 뿌리를 그대로 응축하고 있다. 눈 위에서 종종걸음을 하는 까치는 봄이 오고 있다는 봄의 전령사다. 반면에 첫 눈 내린 아침 설원에 찍힌 까치의 첫 발자국은 겨울을 알리는 전령사다. 그런데 그 첫 발자국은 이미 바람과 입 맞추고 햇살과 몸 섞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전복의 미학이 있다. 시는 어렵고 고상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시를 생활 속에서 쉽고 친근하게 접할 수 있..

짧은 시 2024.02.08

김소월 삼수갑산

김소월 삼수갑산. 고향에,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도... 삼수갑산 /김소월 삼수갑산 내 왜 왔노 삼수갑산이 어디뇨 오고나니 기험(崎險)타 아하 물도 많고 산첩첩(山疊疊)이라 아하하 내 고향을 도로 가자 내 고향을 내 못 가네 삼수갑산 멀드라 아하 촉도지난(蜀道之難)이 예로구나 아하하 삼수갑산이 어디뇨 내가 오고 내 못 가네 불귀(不歸)로다 내 고향 아하 새가 되면 떠가리라 아하하 님 계신 곳 내 고향을 내 못 가네 내 못 가네 오다 가다 야속타 아하 삼수갑산이 날 가두었네 아하하 내 고향을 가고지고 오호 삼수갑산 날 가두었네 불귀로다 내 몸이야 아하 삼수갑산 못 벗어난다 아하하 🍒 ❄출처 : 『신인문학』 3호, 1934.11/ 『김소월시전집』, 문학사상사, 2007. 🍎 해설 * 기험 : 산이 높고 험함...

좋은시 2024.02.07

천양희 2월은 홀로 걷는 달

천양희 2월은 홀로 걷는 달. 설날이 다가온다. 이런 반성을 하면서... 2월은 홀로 걷는 달 /천양희 헤맨다고 다 방황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하며 미아리를 미아처럼 걸었다 기척도 없이 오는 눈발을 빛인듯 밟으며 소리 없이 걸었다 무엇에 대해 말하고 싶었으나 말할 수 없이 말없이 걸었다 길이 너무 미끄러워 그래도 낭떠러지는 아니야, 중얼거리며 걸었다 열리면 닫기 어려운 것이 고생문苦生門이란 모르고 산 어미같이 걸었다 사람이 괴로운 건 관계 때문이란 말 생각나 지나가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걸었다 불가능한 것 기대한 게 잘못이었나 후회하다 서쪽을 오래 바라보며 걸었다 오늘 내 발자국은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된다는 말 곱씹으며 걸었다 나의 진짜 주소는 집이 아니라 길인가? 길에게 물으며 걸었다 🍒 ❄출처 : 천..

좋은시 2024.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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