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박준 낙서

무명시인M 2023. 5. 26.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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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낙서.

박준 낙서. 인정이 넘치는 훈훈한 시.

낙서

/박준

저도 끝이고 겨울도 끝이다 싶어

무작정 남해로 간 적이 있었는데요

거기는 벌써 봄이 와서

농어도 숭어도 꽃게도 제철이었습니다

혼자 회를 먹을 수는 없고

저는 밥집을 찾다

근처 여고 앞 분식집에 들어갔습니다

몸의 왼편은 겨울 같고

몸의 오른편은 봄 같던 아픈 여자와

늙은 남자가 빈 테이블을 지키고 있는 집

메뉴를 한참 보다가

김치찌개를 시킵니다

여자는 냄비에 물을 올리는 남자를 하나하나 지켜보고

저도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그들을 봅니다

남자는 돼지비계며 김치며 양파를 썰어 넣다 말고

여자와 말다툼을 합니다

조미료를 그만 넣으라는 여자의 말과

더 넣어야지 맛이 난다는 남자의 말이 끓어넘칩니다

몇 번을 더 버티다

성화에 못 이긴 남자는

조미료 통을 닫았고요

금새 뚝배기를 비웁니다

저를 계속 보아오던 두 사람도

그제야 안심하는 눈빛입니다

휴지로 입을 닦다 말고는

아이들이 보고 싶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잔뜩 낙서해 놓은 분식집 벽면에

봄날에는

'사람의 눈빛이 제철'이라고

조그맣게 적어놓았습니다. 🍒

 

출처 :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7.

 

🍎 해설

한 편의 소설과 같은 시다.

분식집을 운영하는 부부. 여주인이 병이 들었다.

이제껏 홀 서빙일을 담당했던 남편이 주방장 일을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게 되었다.

 

손님은 이를 눈치채고 가장 만들기 쉽다고 생각되는 김치찌개를 주문한다. 그러나 김치찌개 간 맞추기가 어디 쉬운가? 남편이 요리를 시작하자마자 아내의 훈수가 시작된다. 다툰다. 아슬아슬하다.

 

손님은 아주 맛있다는 듯이 그 김치찌개를 단숨에 먹어 치운다.손님은 춥고 배고프고 절망에 빠진 부부에게 안심을 선물한 것이다.

 

불안한 눈빛이 안심의 눈빛으로 바뀌던 그 분식집 벽면에 손님은 낙서를 한 줄 남긴다.

 

봄날에는 '사람의 눈빛이 제철'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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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밥집을 찾다

근처 여고 앞 분식집에 들어갔습니다

​아픈 여자와

늙은 남자가 빈 테이블을 지키고 있는 집

메뉴를 한참 보다가

김치찌개를 시킵니다

여자는 냄비에 물을 올리는 남자를 하나하나 지켜보고

저도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그들을 봅니다

조미료를 그만 넣으라는 여자의 말과

더 넣어야지 맛이 난다는 남자의 말이 끓어넘칩니다

금새 뚝배기를 비웁니다

저를 계속 보아오던 두 사람도

그제야 안심하는 눈빛입니다

 

잔뜩 낙서해 놓은 분식집 벽면에

봄날에는

'사람의 눈빛이 제철'이라고

조그맣게 적어놓았습니다.

여자는 냄비에 물을 올리는 남자를 하나하나 지켜보고
금새 뚝배기를 비웁니다
그제야 안심하는 눈빛입니다
낙서. 봄날에는 사람의 눈빛이 제철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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