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악 좋은 시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러시아를 떠돌며 장사를 하면서 애들을 키운 조선인 아버지가 임종을 맞는다.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이용악
우리집도 아니고
일가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露領)을 다니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마디 남겨 두는 말도 없었고
아무을만의 파선도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 뜨시잖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갈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를 가리켰다
때늦은 의원이 아무 말없이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
❄출처 : 시집 『분수령(1937년) 수록, 이용악 시집 『이용악 시전집』,문학과지성사,2018.
🍎 해설
*노령: 러시아
*설룽한; 썰렁한
*미명: 무명(천)의 오기.
이 시는 일제의 핍박에 의해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삶을 꾸려가던 한 조선인 아버지의 임종을 통해 일제 강점기 하의 조선 유랑민들의 비극적인 삶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일제의 탄압에 의해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조선인 아버지는 낯선 러시아에서 장사를 하며 아들과 딸들을 잘 키웠다. 고생이 참으로 많았다.
그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무런 유언도 없었고 침상도 없이 목침을 벤채. 가족들은 슬프다. 그러나 시인은 그 슬픔을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라고 말하면서 비극을 객관화시키고 있다.
이 비극의 객관화는 우리에게 더욱 안타까운 슬픔을 느끼게 한다. 시적 리듬도 뛰어나다. 명시다.
우리집도 아니고
일가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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