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의 전당 헌액 명시

정지용 명시 백록담

무명시인M 2022. 3. 28. 15:50
728x90
반응형

정지용 명시 백록담. 사진은 제주도 한라산 백록담 전경 촬영: 네이버 카페 좋은사람들.

정지용 명시 백록담. 향수와 함께 정지용 시인의 2대 명시 가운데 하나다.

백록담

/정지용

1.

절정에 가까울수록 뻐꾹채꽃 키가 점점 소모된다. 한 마루 오르면 허리가 스러지고 다시 한 마루 위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중에는 얼굴만 갸옷 내다본다. 화문花紋처럼 판 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뻐꾹채 키는 아주 없어지고도 팔월 한철엔 흩어진 성신星辰처럼 난만하다. 산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아도 뻐꾹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2.

암고란巖古蘭, 환약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아 일어섰다.

 

3.

백화白樺 옆에서 백화가 촉루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백화처럼 흴 것이 숭없지 않다.

 

4.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5.

바야흐로 해발 육천 척 위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 여기고 산다. 말이 말끼리 소가 소끼리, 망아지가 어미 소를 송아지가 어미 말을 따르다가 이내 헤어진다.

 

6.

첫 새끼를 낳노라고 암소가 몹시 혼이 났다. 얼결에 산길 백 리를 돌아 서귀포로 달아났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읜 송아지는 움매―움매―울었다. 말을 보고도 등산객을 보고도 마구 매어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모색毛色이 다른 어미한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

 

7.

풍란이 풍기는 향기, 꾀꼬리 서로 부르는 소리, 제주 휘파람새 휘파람 부는 소리, 돌에 물이 따로 구르는 소리, 먼 데서 바다가 구길 때 솨―솨―솔소리, 물푸레 동백 떡갈나무 속에서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다시 칡넌출 기어간 흰 돌바기 고부랑길로 나섰다. 문득 마주친 아롱점말이 피하지 않는다.

 

8.

고비고사리 더덕순 도라지꽃 취 삿갓나물 대풀 석이 별과 같은 방울을 달은 고산 식물을 새기며 취하며 자며 한다. 백록담 조촐한 물을 그리어 산맥 위에서 짓는 행렬이 구름보다 장엄하다. 소나기 놋낫 맞으며 무지개에 말리우며 궁둥이에 꽃물 이겨 붙인 채로 살이 붓는다.

 

9.

가재도 기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구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쫓겨온 실구름 일말에도 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굴에 한나절 포긴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조차 잊었더니라.

 

출처 : 정지용 시집, 백록담, 백양당, 1946.(초판본): 이 초판본은 중고 도서시장에서 한 권에 5백만원에 거래되고 있다.

 

🍎 해설

이 시는 향수와 함께 정지용 시인의 2대 명시 가운데 하나다.

 

이 작품은 19394문장지 제3호에 발표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 창작된 시다.

시인은 한라산 백록담에 오르면서 일제 강점기의 부정적인 상황을 비판하고 현실 극복의지를 한라산의 고산식물과 동물 관찰을 통해 현장감 넘치게 보여준다.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산문시 형식이면서도 서정적인 리듬과 아름다운 시어들은 깊은 감동을 준다.

 

시인은 한라산에서 어미 여읜 송아지를 보며 일제 강점기에 정체성 잃은 우리 민족을 연상하고 백록담을 보며 몰아의 경지를 느낀다.

 

시인은 백록담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우리 삶의 터전이 일제 강점기라는 부정적 현실로 인해서 훼손되고 있는 상황을 안타까워 한다. 백록담은 국토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면서도 일제 강점기에 그 국토에 사는 사람들의 고통스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그런 공간이다. 시인은 그걸 서정적으로 형상화하였다.

반응형

절정에 가까울수록 뻐꾹채꽃 키가 점점 소모된다.

암고란巖古蘭, 환약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아 일어섰다.

 

바야흐로 해발 육천 척 위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 여기고 산다. 말이 말끼리 소가 소끼리, 망아지가 어미 소를 송아지가 어미 말을 따르다가 이내 헤어진다.

 

가재도 기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구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쫓겨온 실구름 일말에도 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굴에 한나절 포긴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조차 잊었더니라.

Source: www. pexels. com

반응형

'명예의 전당 헌액 명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지훈 명시 승무  (0) 2022.04.08
김기림 명시 나비와 바다  (0) 2022.03.30
조병화 명시 해마다 봄이 되면  (0) 2022.03.22
김동명 명시 파초  (0) 2022.03.19
김동환 명시 산 너머 남촌에는  (0) 2022.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