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허수경 좋은 시 폐병쟁이 내 사내

무명시인M 2022. 2. 18. 04:59
728x90
반응형

허수경 좋은 시 폐병쟁이 내 사내. Source: www. pexels. com

허수경 좋은 시 폐병쟁이 내 사내. 그 사내 내가 갓 스물 넘어 만났던 사내.

폐병쟁이 내 사내

/허수경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꼴 갖춰 밤 어두운 길에서 만났더라면 지레 도망질이라도 쳤을 터이지만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속 같아 내라도 턱하니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어주고 싶었네

 

산가시내 되어 독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 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같이 맛깔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 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어디 내 사내뿐이랴 🍒

 

출처 : 허수경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실천문학사, 1988(초판). 초판본은 품절되어 중고시장에서 50,000원에 거래되고 있다.

 

🍎 해설

허수경 시인은 특출한 언어감각, 전통적 서정에 실천적 역사의식을 덧입힘으로써 독자적인 미학을 구축했다.

 

시인은 독특한 창의 가락으로, 세상 한편에 들꽃처럼 피어 있는 누추하고 쓸쓸한 마음에 대해 노래한다. 시인은 사라져가고 버림받고 외롭고 죽어 있는 모든 마음들을 따뜻한 모성의 육체로 애무하고 품는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긁히고 갈라지고 부러진 남성성을 탁월한 여성성의 이미지로 잉태해낸다. 이 시도 시인이 아주 젊은 날에 쓴 그런 시다.

 

20대에 내놓은 두 시집으로 일약 한국 시의 중심으로 진입한 허수경 시인은 그러나 <혼자 가는 먼 집>을 낸 직후 돌연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독일 뮌스터대에서 고대동방고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독일 남자와 결혼하였다. 그 독일 남자는 폐병쟁이는 아니었으나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속 같았다.

 

발굴 작업을 위해 일 년의 절반 정도를 모래 서걱이는 터키나 이집트의 변방에 가 있고, 새벽이면 모국어로 시를 썼다. 시인의 유일한 취미는 집 뒤란에 텃밭을 만들고 한국에서 공수한 씨를 뿌려 상추며 쑥갓 등을 직접 길러 먹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이국에서 암 투병 중에 향년 54세로 하늘나라로 갔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김용택 시인의 해설

허수경의 사내가 되어 잎차같이 눕고 싶다. 후후 불어 더운 국물 먹으면 그 국물 식은 땀 흘리며 마시고 싶다. 그러면 그 여인 슬픈 눈길로 날 내려다보며 땀 닦아주겠지. 눈물 닦아주겠지.

- 김용택 편저, 시가 내게로 왔다2, 마음의숲, 2004애서 발췌.

 

🌹손택수 시인의 해설

굽이굽이 막힘없는 가락이 거부할 수 없는 유장한 물결을 이루었다. '백정집 칼잽이', '허벅살 선지피' 처럼 섬뜩하게 날이 선 말들도 이 거침없는 노래 속에서는 한없이 사랑스럽기만 하다.

 

생선 배따는 것만 봐도 경악을 금치 못하고 몸서리를 칠 그녀를 서슴없이 백정집 칼잽이가 되게 하는 것은 모전여전의 하염없는 연민이다. 연민을 뗏목 삼아 우리는 더러 섬처럼 고립된 타자에게로 건너가 '슬픔만한 거름이 없음'을 발견하는 자신과 만나게 된다. 그래서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같이 맛갈 데인 잎차같이' 달래주고 싶은 것은 사내만이 아니라 나의 눈빛이기도 하다. 놀라운 것은 그 눈빛이 병든 사내와 나에 머물지 않고 더 많은 아픔들을 향해 열려 있다는 점이다.

 

모든 여성적인 것들이 우리를 이끌어간다고 했던가. 마른 대지를 적시듯 흐르는 모전여전의 이 도저한 모음을 달여 만든 진국 한 사발이 가슴을 뜨겁게 한다.

반응형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꼴 갖춰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속 같았네

 

산가시내 되어 독오른 뱀을 잡고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 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맛깔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

 

어디 내 사내뿐이랴

Source: www. pexels. 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