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안도현 좋은 시 저물 무렵

무명시인M 2021. 12. 23. 03:25
728x90
반응형

안도현 좋은 시 저물 무렵. Source: www. pixabay. com

안도현 좋은 시 저물 무렵. 당신의 첫 키스는? 청춘을 아프게 반추하는 안도현 시인의 좋은 시.

저물 무렵

/안도현

그 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서 강물이 사라지는 쪽 하늘

한 귀퉁이를 적시는 노을을 자주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둘 다 말도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 애와 나는 저무는 세상의 한쪽을

우리가 모두 차지한 듯싶었습니다.

 

얼마나 아늑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는지요. 오래오래 그렇게 앉아 있다가 보면

양쪽 볼이 까닭도 없이 화끈 달아오를 때도 있었는데

 

그것이 처음에는

붉은 노을 때문인 줄로 알았습니다. 흘러가서는 뒤돌아

오지 않는 물소리가 그 애와 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그 애는 날이 갈수록

부쩍 말수가 줄어드는 것이었고 나는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웠습니다. 다만 손가락으로 먼 산의 어깨를 짚어가며

 

강물이 적시고 갈

그 고장의 이름을 알려주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지팡이었습니다.

강물이 끝나는 곳에 한없이 펼쳐져 있을 여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큰 바다를

 

그 애와 내가 건너야 할

다리 같은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습니다.

그래와 같이 살 수 있는 집이 있다면 하고 생각하며 마을로 돌아오는 길은

늘 어찌나 쓸쓸하고 서럽던지

 

가시에 찔린 듯

가슴이 따끔거리며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애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포개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애의 여린 숨소리를

열몇 살 열몇 살 내 나이를 알고 있는 산수 공식을 아아 모두 삼켜버릴 것 같은

노을을 보았습니다.

 

저물 무렵 그 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세상을 물들이던 어린 노을인 줄을

지금 생각하면 아주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

 

출처 : 안도현, 저물 무렵, 안도현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 푸른 숲, 1991.

 

🍎 도종환 시인의 해설

우리가

어린 노을이던 날의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저물 무렵 강둑에 나란히 앉아서

 

손 한번 잡아주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깝기만 하던 날들의 풋풋한 사랑. 그 애와 건너야 할 바다,

그 애와 살고 싶은 집, 이런 것들을 생각하며 가슴 따끔거리던 날들.

 

처음 입술을 포개던 날

들었던 여린 숨소리와 열몇 살 열몇 살 내 나이를 우리는 오래오래

잊지 못합니다.

 

오늘이 칠석입니다.

지상에서 못 이룬 사랑이 하늘에서라도 꼭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부디 지상에서도 아름답게 사랑하시길.

- 도종환 지음, 꽃잎의 말로 편지를 쓴다, 창비, 2007에서 발췌.

반응형

그 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서 강물이 사라지는 쪽 하늘

한 귀퉁이를 적시는 노을을 자주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가시에 찔린 듯

가슴이 따끔거리며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애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포개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애의 여린 숨소리를

열몇 살 열몇 살 내 나이를 알고 있는 산수 공식을 아아 모두 삼켜버릴 것 같은

노을을 보았습니다.

Source: www. pexels. 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