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좋은 시 여행자를 위한 서시. 좋은 시다. 방콕 여행자를 위한 서시라고 할 수 있다.
여행자를 위한 서시
/류시화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아가리라
한때는 불꽃 같은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여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순간 속에 자신을 유폐시키던 일도 이제 그만
종이꽃처럼 부서지는 환영에
자신을 묶는 일도 이제는 그만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맡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자는 행복하여라
그대의 영혼은 아직 투명하고
사랑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상처 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리
그대가 살아온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니
이제 자기의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수많은 열리지 않는 문들을 두드려야 하리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하리
길은 또다른 길을 가리키고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 속으로 그대를 들여다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꾸리라.
❄출처 : 류시화, 여행자를 위한 서시,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 열림원, 2015.
🍎 해설
코로나 19 장기화로 여행이 실종되었다.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지만 자유로운 여행은 2022년 말이 되어야 가능해 진다고 한다.(Agoda CEO 등의 전망)
류시화 시인은 16년 동안 겨울이 오면 인도를 여행한 세계적 여행가이다. 이 시는 코로나고 뭐고간에 일단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천천히 읽어 보면 시인이 인도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만나기 위한 여행을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은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내면 안의 자신의 참모습을 찾아 여행을 시도한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자는 행복하다고 노래한다. 사랑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상처입기를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결국 진정한 자기 자신을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한다고 노래한다.
여행광들이여, 그런 여행이라면 집콕-방콕 여행에서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본격적인 여행을 위한 서시로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자는 행복하여라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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