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좋은 시 섶섬이 보이는 방-이중섭의 방에 와서. 이중섭 화백의 실화다.
섶섬이 보이는 방-이중섭의 방에 와서
/나희덕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데기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 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껍데기를 그릇 삼아 상을 차리던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다
꿈 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 한 날 많았더라도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고기는 아이들과 해질 때까지 놀았다
게가 아이의 잠지를 물고
아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고
물고기는 아고리의 손에서 파닥거리던 바닷가,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빈 조개껍데기에 세 든 소라게처럼
❄출처 : 나희덕, 섭섬이 보이는 방, 섭섬이 보이는 방(제22회 소월시 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사, 2016.
☘주
*섶섬: 서귀포의 섬.(섭섬이라고도 함)
*아고리와 발가락군: 화가 이중섭(아고리)과 그의 아내(발가락군)가 서로를 부르던 애칭.
*관에 가까운 방: 방을 빌려 준 할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그 고방은 1.5평.
*은박지 그림: 그림 재료를 살 돈이 없어서, 화가는 한때 담뱃갑의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
*연 구분: 가독성을 높이기 위하여 연 구분을 하였음.
🍎 해설
이중섭 화백(1916~1956년)은 국민들이 제일 좋아하는 천재 화가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중섭 화가는 부산으로 피난 갔다가 1951년 제주도로 건너가 서귀포의 한 귀퉁이 고방을 빌려 1년 남짓 생활을 했다. 가족과 함께 했던 이 서귀포의 생활이 화가 이중섭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그 후에 이중섭은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영양실조와 병으로 41세의 나이에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이중섭에게 그림을 부탁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중섭의 그림 값을 떼어먹었다고 한다. 사망 소식을 듣고 친구들이 서대문 적십자병원으로 달려갔는데, 그의 머리맡에는 밀린 병원의 청구서만 남아 있었다.
나희덕 시인이 제주도 여행 중 서귀포에 있는 화가 이중섭이 살던 귀퉁이 고방에 머물면서 얻은 생각을 형상화한 작품이 바로 이 시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시다. 가난하고 슬픈 이야기를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게 그린단 말인가? 한 폭의 수채화다. 동시에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는 시다.
이 시는 어두운 현실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면서 결국은 우리 인생이 빈 조개껍데기에 세 든 소라게와 같다는 그 어떤 깨우침을 주고 있다.
🌹 나희덕 시인의 수상 소감
나희덕 시인은 문학사상사에서 주관하는 2008년 제22회 소월시문학상 대상을 받았다. 대상작은 바로 이 시 였다. 나희덕 시인은 수상 소감을 이렇게 피력하였다.
"슬픔을 줄곧 노래해왔다는 점에서, 서정적 전통의 자장(磁場)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연을 통한 시적 발견에 주로 의존해왔다는 점에서, 저는 소월의 식솔 또는 후예입니다."
"그러나 저의 시는 아직 소월의 시가 품고 있는 어떤 귀기(鬼氣), 또는 죽음에 육박하는 근원적인 목소리를 지니지 못한 듯합니다. 시인이 된 지 20년이 가까워오면서도 스스로의 무의식을 제대로 대면하지 못한 탓입니다. 의식의 강물을 얼마나 더 퍼내야 그 바닥을 볼 수 있는 것인지, 언어의 두레박을 던지고 거두어들이면서 막막해질 때가 많았습니다.“
나희덕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 소감문에서 발췌, 2008.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빈 조개껍데기에 세 든 소라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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