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재 좋은 시 노독. 당신은 길 너머를 그리워 한 죄를 짓지는 않았습니까?
노독
/이문재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부리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출처 : 이문재, 노독, 마음의 오지, 문학동네, 1999.
🍎 해설
노독(路毒). 옛날에는 짚신 신고 한양에 과거 보러갈 때엔 노독을 풀 수가 있었다. 문경 새재 주막에서 하룻밤 자면서 여독을 풀었다.
내가 살아 온 길을 뒤돌아 본다. 정신없이 걸어 왔다. 이 길이 과연 내 길이었는가? 지금 분명히 내 몸과 마음에 노독은 생겨 있는데 풀 시간도 없고 풀 길도 마땅치 않다. 가는 길이 아득할뿐이다. 그러나 이 시를 읽으면 희미하나마 뭔가 노독을 풀 길이 보인다.
먼저, 가던 길 어두워 그만 내려서야 할 그 때가 닥쳐오리라는 것을 안다 해도, 나는 내 나름대로의 나의 길을 가야 하겠다는 점이다. 그건 인생의 운명이다.
다음, 앞으로도 이 시의 방아쇠인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이 시를 아주 교과서적으로 받아 들여서 “앞으로는 마음 속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삶을 함부로 낭비하지 않겠다.”는 점이다.
🌹 장석주 시인의 감상문
오래 전 읽은 시인데, 다시 읽어도 가슴이 아릿해집니다. 여수(旅愁)의 멜랑콜리가 날카롭게 가슴을 베기 때문이겠죠. 길 위에 있는 자는 어두운 세상에서 스스로 제 삶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야 하지요. 더러는 몸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더 올리기도 하겠죠. 하지만 “함부로 길을 나서/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에는 감형(減刑)이 없습니다. 길은 길로 이어지는 것이어서 여독(旅毒) 품고, 다시 길을 나서야 하니까요!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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