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이문재 좋은 시 노독

무명시인M 2021. 5. 22.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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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좋은 시 노독. Photo Source: www.pixabay. com

이문재 좋은 시 노독. 당신은 길 너머를 그리워 한 죄를 짓지는 않았습니까?

노독

/이문재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부리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출처 : 이문재, 노독, 마음의 오지, 문학동네, 1999.

 

🍎 해설

노독(路毒). 옛날에는 짚신 신고 한양에 과거 보러갈 때엔 노독을 풀 수가 있었다. 문경 새재 주막에서 하룻밤 자면서 여독을 풀었다.

 

내가 살아 온 길을 뒤돌아 본다. 정신없이 걸어 왔다. 이 길이 과연 내 길이었는가? 지금 분명히 내 몸과 마음에 노독은 생겨 있는데 풀 시간도 없고 풀 길도 마땅치 않다. 가는 길이 아득할뿐이다. 그러나 이 시를 읽으면 희미하나마 뭔가 노독을 풀 길이 보인다.

 

먼저, 가던 길 어두워 그만 내려서야 할 그 때가 닥쳐오리라는 것을 안다 해도, 나는 내 나름대로의 나의 길을 가야 하겠다는 점이다. 그건 인생의 운명이다.

다음, 앞으로도 이 시의 방아쇠인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이 시를 아주 교과서적으로 받아 들여서 앞으로는 마음 속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삶을 함부로 낭비하지 않겠다.”는 점이다.

 

🌹 장석주 시인의 감상문

오래 전 읽은 시인데, 다시 읽어도 가슴이 아릿해집니다. 여수(旅愁)의 멜랑콜리가 날카롭게 가슴을 베기 때문이겠죠. 길 위에 있는 자는 어두운 세상에서 스스로 제 삶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야 하지요. 더러는 몸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더 올리기도 하겠죠. 하지만 함부로 길을 나서/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에는 감형(減刑)이 없습니다. 길은 길로 이어지는 것이어서 여독(旅毒) 품고, 다시 길을 나서야 하니까요!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Photo Source: www.pixabay. 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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