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자 좋은 시 자수. 자수는 왜 하십니까?
자수
/허영자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수를 놓는다.
금실 은실 청홍실
따라서 가면
가슴 속 아우성은 절로 갈앉고
처음 보는 수풀
정갈한 자갈돌의
강변에 이른다.
남향 햇볕 속에
수를 놓고 앉으면
세사번뇌
무궁한 사랑의 슬픔을
참아 내을 듯
머언
극락정토 가는 길도
보일 상 싶다.
❄출처 : 허영자, 자수, 허영자 전시집, 마을, 1998.
🍎 해설
이 시는 일체의 군말을 배제한 시어의 절제를 통해 압축미를 보여 준다. 바쁜 틈을 타서 잠시 수를 놓는 일을 통해 자신의 삶의 깊이를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다. 고뇌와 슬픔을 다스리고 마음의 평화를 찾아간다.
시인은 자수를 하는 동안 자신을 괴롭혀 왔던 사랑의 슬픔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온갖 번뇌에서 벗어난 상태에 이르는 방법마저 찾아낼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절대적인 구원까지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면의 고통에서 벗어나 희망을 갖는 방법은 일상적인 평범한 일에 몰두하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 우두커니 앉아 있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기자] 새삼스런 지론이지만, 선생님의 시편 <우두커니>를 통해 느림의 미학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느림의 미학에 대한 시인의 견해랄까 입장을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허영자] 아시다시피 현대는 속도의 시대입니다. 속도에 가속도가 붙어 점점 더 빠르게 움직이고 바쁘게 살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러나 물의 흐름을 보십시다. 물은 때로 폭포가 되어 급히 쏟아지기도 하고 때로는 모래톱을 만나 느리게 돌아가기도 합니다. 인생에도 완급이 있다고 봅니다. 바삐 살아야 할 때도 있지만 천천히 생각하며 살아야 할 때도 있지 않겠습니까. 팽팽하게 긴장하며 살아야 할 때도 있겠지만 우두커니 앉아 있어야 할 때도 있겠습니다.
“우두커니” 란 요컨대 무심의 시간, 나아가 관조의 시간, 혹은 휴식의 시간, 모든 사물에 대한 의미 제거의 시간, 사물의 본질을 고찰하는 시간 등등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 허영자 시인의 언론 인터뷰에서 발췌
남향 햇볕 속에
수를 놓고 앉으면
세사번뇌
무궁한 사랑의 슬픔을
참아 내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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