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달자 가을 들. 가을 들판처럼 살아가자.
가을 들
/신달자
삼천 번을 심고 추수하고
다시 삼천 번을 심고 추수한 후의
가을 들을 보라
극도로 예민해진 저 종이 한 장의 고요
바람도 다소곳하게 앞섶 여미며 난다
실상은 천년 인내의 깊이로
너그러운 품 넓은 가슴
나는(飛) 것의 오만이
어쩌다 새똥을 지리고 가면
먹물인가 종이는 습자지처럼 쏘옥 빨아들인다
이런 넉넉한 종이가 있나
다 받아 주는데도 단 한 발자국이 어려워
입 닫고 고요히 지나가려다
멈칫 서 떨고 있는 초승달. 🍒
❄출처 : 신달자 시집, 『종이』, 민음사, 2011.
🍎 해설
광화문글판이 2023년 가을을 맞아 새롭게 단장했다. 이번 광화문글판 가을편은 신달자 시인의 시 ‘가을 들’에서 가져왔다.
이 시는 가을 들판처럼 살아가자는 의미를 담았다. 가을걷이가 끝난 뒤 빈 들판은 모든 걸 새롭게 키워낼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 마치 종이의 여백과 같다. 언제나 더 나은 다음을 기약하는 가을 들판처럼 끊임없이 비우고, 채우는 충실한 삶을 살아가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시는 가을 들판을 종이에 빗대었다. “이런 넉넉한 종이가 있나”라고 하면서 가을 들판의 모든 것을 품에 안는 너그러움을 은유한다. 마치 종이의 여백처럼 앞으로의 무한한 가능성을 은유하고 있다. 추수가 끝난 뒤 아쉬움보다는 ‘새 들판을 얻었다’고 뿌듯해하는 농부의 뒷모습도 아른거린다.
종이책은 수명이 다했다고 전자책에 길을 내주라고 말하는 요즘의 디지털 시대에 시인은 아날로그의 감수성을 강조한다. 그는 종이라는 시집을 냈다. “종이 시집을 내 보는 것이 오랜 꿈이었다. 그런데 종이가 사라진다는 목소리가 커져 갔다. 종이가 죽었다는 말도 나왔다. 마음이 급해졌다. 문명은 나를 편안하게 했지만 그만큼 정신은 삭막해졌다. 나는 인간의 선한 본성, 그 아름다움에 종이라는 사물을 대면시켜 보고 싶었다. 따뜻함, 영원함, 영성적 노동, 가득함, 화합, 평화, 사랑, 모성, 순수, 고향, 우직함, 이런 충돌 없이 잘 섞이는 감정의 물질들을 하나의 원소로 종합한 것을 ‘종이’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의 말이다.
모든 것을 종이로 보는 데에는 다소 무리한 점이 있다. 그러나 “다만 이 시집은 인간의 따뜻한 본성을 그리워하고 그 본성을 되찾아 보려는 한 톨의 씨앗”이라는 말처럼, 시인의 인간 본성의 따뜻함에 대한 믿음만은 공감이 간다. 모든 것이 빨라지기만 하는 시대, 맨눈이 아니라 스크린으로 세상을 보는 이 시대는 종이가 필요하다. 인간의 향기가 필요하다. 아날로그적인 감수성과 인간성이 필요하다.
삼천 번을 심고 추수하고
다시 삼천 번을 심고 추수한 후의
가을 들을 보라
이런 넉넉한 종이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