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좋은 시 가을 서한 1. 내일 아침엔 바바리코트를 입고 출근하시라.
가을 서한 1
/나태주
1
끝내 빈 손 들고 돌아온 가을아,
종이기러기 한 마리 안 날아오는 비인 가을아,
내 마음까지 모두 주어버리고 난 지금
나는 또 그대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까 몰라.
2
새로 국화잎새 따다 수놓아
새로 창호지문 바르고 나면
방안 구석구석까지 밀려들어오는 저승의 햇살.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만의 겨울양식.
3
다시는 더 생각하지 않겠다,
다짐하고 내려오는 등성이에서
돌아보니 타닥타닥 영그는 가을꽃씨 몇 옴큼,
바람 속에 흩어지는 산 너머 기적 소리.
4
가을은 가고
남은 건
바바리코우트 자락에 날리는 바람
때묻은 와이셔츠 깃.
가을은 가고
남은 건
그대 만나러 가는 골목길에서의
내 휘파람 소리.
첫눈 내리는 날에
켜질
그대 창문의 등불빛
한 초롱. 🍒
❄출처 : 나태주 시집,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푸른 길,2017.
🍎 해설
추석 연휴가 오늘로 끝난다. 연휴가 끝나면 가을이 성큼 다가설 것으로 보인다. 가을이 되면 나는 으레히 사랑의 추억길을 헤매인다. 끝내 빈 손 들고 돌아온 가을을 나는 맞이한다. 마음까지 모두 주어버리고 난 지금, 속알머리 없이 나는 또다시 그대에게 무엇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대는 지금 내 곁에 없다. 안타깝다. 국화잎을 따다 창호를 새로 바르며 나는 다짐한다. “다시는 더 생각하지 않겠다.”라고. 내려오는 길목에서 나는 만난다. 자연의 이름 모를 ‘가을꽃씨 몇 옴큼’. 이 꽃씨는 사랑하는 내 마음을 저장했다가 새봄에 환한 사랑의 꽃을 다시 싹 틔울지도 모른다.
그런 사랑의 부활을 예고하는 징표는 가을이 간 뒤에 남는 ‘바바리코우트 자락에 날리는 바람과 때 묻은 와이셔츠 깃’이다.
또한 ‘그대 만나러 가는 골목길에서의 휘파람 소리’는 ‘기적소리’로 변하여 바람타고 산 너머 그대 창을 노크할 것이다. 그러면 아마 그리운 소식으로 첫눈 내리는 날쯤엔 그대 창에 나를 기다리는 바알간 등불 하나 피어 오를 것이다.
헤어진 사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여, 내일 연휴 끝나고 첫 출근 길에 바바리코트에 깃에 때가 묻은 와이셔츠를 입고 출근하시라. 그리고 퇴근 길에 가을꽃씨 몇 웅큼을 가져 오시기 바란다. 그러고 나서 헤어진 옛사랑이 그대를 기다리는 바알간 등불 한 초롱을 창가에 켜 놓을 수 있도록 나와 함께 휘파람 불러 갑시다.
끝내 빈 손 들고 돌아온 가을아,
종이기러기 한 마리 안 날아오는 비인 가을아,
다시는 더 생각하지 않겠다,
가을은 가고 남은 건
바바리코우트 자락에 날리는 바람
때묻은 와이셔츠 깃.
가을은 가고 남은 건
그대 만나러 가는 골목길에서의
내 휘파람 소리.
첫눈 내리는 날에 켜질
그대 창문의 등불빛
한 초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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