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한강 편지

무명시인M 2024. 11. 24.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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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편지.

한강 편지. 한강 작가의 실질적 데뷔 작품.

편지

/한강

그동안 아픈데 없이 잘 지내셨는지

궁금했습니다

꽃 피고 지는 길

그 길을 떠나

겨울 한번 보내기가 이리 힘들어

때 아닌 삼월 봄눈 퍼붓습니다

겨우내내 지나온 열 끓는 세월

얼어붙은 밤과 낮을 지나며

한 평 아랫목의 눈물겨움

잊지 못할 겁니다

 

누가 감히 말하는 거야 무슨 근거로 무슨 근거로 이 눈이 멈춘다고 멈추고

만다고… 천지에, 퍼붓는 이… 폭설이, 보이지 않아? 휘어져 부러지는 솔가지

들, … 퇴색한 저 암록빛이, 이, 바람가운데, 기댈 벽 하나 없는 가운데, 아

아… 나아갈 길조차 묻혀버린 곳, 이곳 말이야…

 

그래 지낼 만하신지 아직도 삶은

또아리튼 협곡인지 당신의 노래는

아직도 허물리는 곤두박질인지

당신을 보고난 밤이면 새도록 등이 시려워

가슴 타는 꿈 속에

어둠은 빛이 되고

부셔 눈 못 뜰 빛이 되고

흉몽처럼 눈 멀어 서리치던 새벽

동 트는 창문빛까지 아팠었지요.

 

……… 어째서…마지막 희망은 잘리지 않는 건가 지리멸렬한 믿음 지리멸렬한

희망 계속되는 호흡 무기력한, 무기력한 구토와 삶, 오오, 젠장할 삶

 

악물린 입술

푸른 인광 뿜던 눈에 지금쯤은

달디 단 물들이 고였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한번쯤은

세상 더 산 사람들처럼 마주 보고

웃어보고 싶었습니다.

 

사랑이었을까… 잃은 사랑조차 없었던 날들을 지나 여기까지, 눈물도 눈물겨

움도 없는 날들 파도와 함께 쓸려가지 못한 목숨, 목숨들 뻘밭에 뒹굴고

 

당신 없이도 천지에 봄이 왔습니다

눈 그친 이곳에 바람이 붑니다

더운 바람이,

몰아쳐도 이제는 춥지 않은 바람이 분말 같은 햇살을 몰고 옵니다

이 길을 기억하십니까

꽃 피고 지는 길

다시 그 길입니다

바로 그 길입니다 🍒

 

출처 : 연세대학교 대학신문, 연세춘추, 1992. 11.23.

 

🍎 해설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 작가의 데뷔작품이다. 문단에 데뷔하기 1년 전, 한강 작가는 1992년 연세문화상에서 이 시 ‘편지’로 ‘윤동주 문학상’을 받았다. 그녀는 당시 연세대학교 국문과 4학년 재학생이었다.

이 시가 사실은 한강 작가의 데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현종 시인과 김사인 시인의 심사평

당시 연세대 국문과 교수였던 정현종 시인과 김사인 시인은 한강 작가의 자질을 일찍이 알아보는 유명한 심사평을 남겼다.

 

한강의 작품은 능숙한 솜씨를 보여준다. 굿판의 무당의 춤과 같은 휘몰이의 내적 열기를 발산하고 있는 모습이 독특하다. 그러한 불과 같은 열정의 덩어리는 무슨 선명한 조각과 또 달리, 앞으로 빚어질 어떤 모습들이 풍부히 들어 있는 에너지로 보인다”. “능란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그 잠재력이 꽃피기를 기대해 본다.”

 

🌹한강 학생의 당선소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 있을 줄 알았다. 추억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그 때는 잘 몰랐다.

 

앓아누운 밤과 밤들의 사이, 그토록 눈부시던 빛과 하늘을 기억한다. 그들의 낱낱이 발설해온 오래된 희망의 비밀들을 이제야 엉거주춤한 허리로 주워담는 것이다.

 

...목덜미가 아프도록 뒤돌아보며, 뽑아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기쁨, 내 모든 눈물겨운 이들의 것입니다.”

 

그동안 아픈데 없이 잘 지내셨는지

궁금했습니다

겨울 한번 보내기가 이리 힘들어

때 아닌 삼월 봄눈 퍼붓습니다.

 

그래 지낼 만하신지 아직도 삶은

또아리튼 협곡인지 당신의 노래는

아직도 허물리는 곤두박질인지

 

당신 없이도 천지에 봄이 왔습니다

눈 그친 이곳에 바람이 붑니다

더운 바람이,

몰아쳐도 이제는 춥지 않은 바람이 분말 같은 햇살을 몰고 옵니다

 

이 길을 기억하십니까

꽃 피고 지는 길

다시 그 길입니다

바로 그 길입니다

그동안 아픈데 없이 잘 지내셨는지 궁금했습니다
겨울 한번 보내기가 이리 힘들어 때 아닌 삼월 봄눈 퍼붓습니다
그래 지낼 만하신지 아직도 삶은 또아리튼 협곡인지
당신 없이도 천지에 봄이 왔습니다 눈 그친 이곳에 바람이 붑니다
이 길을 기억하십니까 꽃 피고 지는 다시 그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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