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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무명시인M 2023. 8. 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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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안희연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광화문글판 2023년 여름편 작품.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안희연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갔다
언덕이라 쓰고 그것을 믿으면
 
예상치 못한 언덕이 펼쳐졌다
그날도 언덕을 걷고 있었다
 
비교적 완만한 기울기
적당한 햇살
가호를 받고 있다는 기쁨 속에서
 
한참 걷다보니 음푹 파인 곳이 나타났다
고개를 들자 사방이 물웅덩이였다
 
나는 언덕의 기분을 살폈다
이렇게 많은 물웅덩이를 거느린 삶이라니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이라니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니
 
언덕은 울상을 하고서
얼마 전부터 흰토끼 한마리가 보이질 않는다 했다
 
그뒤론 계속 내리막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밤이 왔다
언덕은 자신에게
아직 토끼가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고요 다음은 반드시 폭풍우라는 사실
여름은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 존재하는 계절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토끼일까
쫓기듯 쫓으며
 
나는 무수한 언덕 가운데
왜 하필 이곳이어야 했는지를 생각했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
 
❄출처 : 안희연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창비, 2020.
 

🍎 해설

여름 언덕을 오르는 일은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무더위와 목마름, 그 밖의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과 싸우는 일이다. 하지만, 언덕에 오르면 시원한 바람이 불고 머리칼이 흩날릴 것이다. 언덕 위에서 세계를 바라보다보면, 무거웠던 것들이 조금은 옅어지기도 하고, 다시 힘을 내 언덕을 내려갈 시간이 찾아오기도 할 것이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쏜살같이 지나간 시간이지만 돌아보면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매 순간순간은 겹겹이 쌓여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어떻게 지나간 줄도 모르는 시간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결국 뭉쳐지고 합해져 저마다 의미를 갖고 있다.
 
결국 인생이라는 여름은 만끽하는 게 아니라 참을성 있게버텨야 한다. 그 방법은? 난관을 절벽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여름 언덕이라고 생각하고 일단 올라 간다.
 

🌹 안희연 시인

안희연 시인. 37세. 사진은 출판사 제공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과 산문집 『흩어지는 마음에게, 안녕』, 『당신은 나를 열어 바닥까지 휘젓고』를 썼다.
 
시인은 등단 3년 만에 펴낸 첫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비 2015)로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하고, 2018년 예스24에서 실시한 ‘한국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 투표에서 시 부문 1위를 차지하는 등 요즘 젊은 시단에서 주목받는 시인이다.
❄출처 : 안희연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창비, 2020, 작가 소개문. 사진 출처도 위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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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갔다
언덕이라 쓰고 그것을 믿으면
 
예상치 못한 언덕이 펼쳐졌다
그날도 언덕을 걷고 있었다
 
한참 걷다보니 음푹 파인 곳이 나타났다
고개를 들자 사방이 물웅덩이였다
 
그뒤론 계속 내리막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밤이 왔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2023년 여름편 광화문글판. 사진은 교보생명 제공.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갔다
예상치 못한 언덕이 펼쳐졌다., 그날도 언덕을 걷고 있엇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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