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명시 자화상. 이 블로그에서는 이 시를 명예의 전당 헌액 명시(카테고리)로 선정하였다.
자화상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출처: 서정주, 자화상, 서정주 시집, 범우사, 2002>
🍏해설
서정주 시인의 명시중 베스트 3의 하나로 꼽힌다.
이 시는 실제로 시인이 스무세 살때 발표하였다.
자조적인 느낌이 있는듯한 스무세 살 시인의 암담한 정신적 방황을 보면서도, 독자들은 언제나 이 시에서 숨막힐 듯 뜨거운 시의 마력을 느끼게 된다.
서정주 시인 팬들은 이 시를 국보처럼 아낀다.
♬국민 애송시가 된 시구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바람의 해석
<시인의 동생 고 서정태 시인>
—'팔 할이 바람'이란 뜻은 어떤 의미일까요.
재작년인가, 문학지망가 수십 명이 여기 와서 그 질문을 해. 그때 그랬어. '누구헌테든 오는 것(바람)이 아니겠냐'고. 어떤 이는 바람이 역풍이지만 어떤 이에겐 따스한 미풍일 수도 있고 시를 읽는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 다를 거야.“
-월간조선 2017.11월호에서 발췌
<서지문 전 고려대 교수>
젊은 시절에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을 읽고 전율하지 않은 한국인이 있을까? 그런데 그 주술(呪術)적인 구절,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의 '바람'은 무엇일까?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유랑으로 보낸 서정주 시인의 '바람'엔 유랑이 큰 몫을 차지하겠고, 그를 유랑하게 만든 기존 질서에 대한 반발, 낯선 세계에 대한 동경, 그리고 그런 유랑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빈곤, 굴욕, 신체적 고난 등이 모두 포함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 보기에는 하찮을망정 그에게는 온 우주였던 가족을 비롯해 정들고 익숙하고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내던져서 거머쥔 '자유'가 아니겠는가.
- 조선일보,2018.5.8.서지문 칼럼에서 발췌
<상식적 해석>
여기서 ‘바람’은 시련과 고통, 방황, 방랑의 삶을 암시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서양 시인이 갈파한 것처럼 시의 해설사는 오류사다. 시인의 깊은 뜻을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다.
♬유명한 시구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문학평론가 조연현>
미당 서정주의 운명을 암시하는 작품이다.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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