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의 전당 헌액 명시

박목월 명시 나그네 <박목월 해설>

무명시인M 2021. 2. 8.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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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 명시 나그네.강나루 건너 밀밭길 사진은 정말 찾기 어려웠다.강나루는 보이지 않지만...

박목월 명시 나그네 <박목월 해설>. 대표적 국민 애송시다. 시인의 자작시 해설을 들어 보시는 것도 삶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
 

나그네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출처: 박목월,나그네, 박목월 시집, 『 청록집 』, 을유문화사, 1975.


 🍎 박목월 시인의 자작시 해설

 

 
🌹 나의 대표작인가?
 
“대표작은?”
흔히 받게 되는 질문이다.
“글쎄요?”
내가 대답을 망설이면,
 
“<나그네> 아닐까요?”
 
그분의 말이다. 하지만, 나는 <나그네>를 대표작이라 생각해 본 일도 없고, 이 작품에 대하여 각별한 애착을 가져본 적도 없다. 작자에 있어서 모든 작품이란 그 자신의 어쩔 수 없는 감정의 필연성에서 빚어진 것이다. 애착을 가진다면, 그가 빚은 모든 작품에 애착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작가나 시인에 있어서 대표작이란 그 자신이 붙인 레테르가 아니라, 세론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그 작품이 가장 우수한가 하는 의미가 아니다. 많은 독자의 너른 공감권을 획득하는 것과 작품의 질적 우수성이 동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하여 내게 있어서는 젊은 날에 내가 입다 버린 낡은 옷과 같은 것으로 여겨질 뿐이다. 진정으로 관심과 애착을 가지는 작품은 지금 내가 빚고 있는, 혹은 빚으려는 작품이다. 창조자로서 나 자신은 과거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나 애착보다 오늘 빚는 일에 애정과 정열을 가지게 되며, 그것을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집중할 뿐이다.
 
🌹 지나가는 나그네와 사랑방
 
<나그네>의 주가 되는 이미지는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이다. 나그네나, 구름이나, 달이나, 우리의 핏줄에 젖어 있는 친숙한 것들이다. 나그네를 우리 고장에서는 과객이라 불렀다. 지나가는 손님이라는 뜻이다. 조선 봉건사회라면 결코 밝은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니다. 봉건적인 제도가 오늘날의 근대사회의 인본주의적제도에 비하여 밝은 것이 못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당시의 사회 자체가 구석구석 어두운 것이 아니다. 오늘날보다 인심이 후박하고 인간미가 풍부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좋은 예가. 즐겨 손님을 맞이하는 일이다, 건축 구조에 있어 사랑이란 손님을 치르기 위한 일종의 사교적인 구실을 하는 것이다.
 
내가 어릴 때만 하여도 우리 큰댁에서는 손님이 끊일 날이 없었다. 우리 집이 부유한 편이 아닌, 그 마을에는 양식 걱정이나 하지 않을 정도의 농가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일모에 낯선 손님이 찾아와서,
 
“주인장 계십니까? 지나기는 나그네입니다. 하루저녁 묵어가게 해 주십시오.”
 
부탁하면 거절하는 일이 없었다.
 
“사랑에 드시라 하여라.”
할아버지가 기쁘게 맞이하였다. 그리고 깍듯이 대접하였다. 그 과객은 이슬과 햇볕에 바랜 옷차림이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그의 두루막 자락에서는 그야말로 이슬과 햇볕 냄새가 풍겼지만 그것은 결코 이 표현에서 느끼는 것 같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었다. 다만 과객들에 대한 잊히지 않는 것은 그들이 한결같이 갈모집을 차고 다니는 일이었다. 의복은 비에 젖어도 갓만은 보호하려는 것일까.
 
🌹 집념에서 벗어난 해탈의 경지
 
구름에 달 가듯이 -의, 구름이 갈라진 틈서리로 건너가는 달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다. 한시에서 흔히 달을 명경-맑은 거울에 비유하지만, 구름이 갈라진 틈서리의 짙푸른 밤하늘로 건너가는 달은 씻은 듯이 맑고 아름다운 것이다. 바람이라도 불러 흘러가는 구름발이 빨라지게 되면, 달은 날개가 돋친 듯 날아가는 것이다. 그 황홀한 정경.
 
나그네나 하늘을 건너가는 달이나 구름이나 모두 무엇에 집념하지 않고 흘러가는 것들이다. 세속적인 구속이나 집념에서 벗어난 해탈의 경지, 그것은 동양적인 높은 정신의 경지일 수도 있다.
 
🌹 현실이 아닌 감정의 거리
 
[‘강나루’ 건너 ‘외줄기 밀밭길 남도 삼백리’ ‘저녁놀 타는 술 익는 마을’은 충분히 향토적인 현실의 풍경일 뿐만 아니라, 공간을 초월하여 살아있는 상징적 실재로서의 한국적 자연인 것이다, 이 자연 속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역시 시간을 초월하여 살아있는 상징적 한국의 나그네인 것이다.]
 
위의 평은 시인 정한모의 말이다.
 
형식적인 면에서는 7ㆍ5조의 정형률을 밟고 있다. 다만 구(句)를 명사로 끊음으로 정형률의 안이성을 탈피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남도 삼백리’가 어디서 어디까지냐고 묻는 이가 있다. 그것은 현실적인 거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감정의 거리’이다.
 
에이츠(Yeats)의 <이니스프리>라는 작품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나는 일어나 바로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외 엮고 흙을 발라 조그만 집을 얽어
아홉 이랑 콩을 심고, 꿀벌은 한 통
숲 가운데 비인 땅에 벌 잉잉거리는 곳
 
나 홀로 거기서 살으리.
 
평화와 이상의 섬을 노래한 이 작품에서 ‘아홉 이랑’은 결코 현실적인 것이 못 된다. 그것은 가난한 대로 충만하게 살려는 사인이 꿈꾸는 행복의 면적이다, ‘남도 삼백리’도 나의 서러운 꿈을 펼쳐놓은 ‘감정의 거리’에 불과한 것이다.
 
🌹 나그네의 처음 원고
 
끝으로, <나그네>를 처음 썼을 무렵의 초고(草稿) 노트를 나는 간직하고 있다. 30여 년이 지난 묵은 노트다. 그 초고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나루를 건너서
외줄기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달빛 어린
남도 삼백리
 
구비마다 여울이
우는 가람을
 
바람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퇴고를 가한 작품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일 것이다. 다만, 퇴고를 할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추천을 받을 때의 선자(選者)의 말이다.
 
“옥에 티와 미인의 이마에 사마귀 하나야 버리기 아까운 점도 있겠으나, 서정시에서 말 한 개 밉게 놓이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 출처: 박목월 시집, 「청록집」, 을유문화사,1975.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이 블로그는 이 시를 명예의 전당 헌액 명시(카테고리)로 선정하였다.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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