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수필

이양하 신록예찬 <전문 및 해설>

무명시인M 2021. 1. 20.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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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전(연세대) 일대를 덮은 신록은 한층 더 생기가 있는 듯 하다.

오늘은 한국 명수필 이양하의 신록예찬을 감상해 보기로 하자. 

 

신록예찬

/이양하

 

봄 여름 가을 겨울, 두루 사시를 두고, 자연이 우리에게 내리는 혜택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나 그 중에도 그 혜택을 풍성히 아낌없이 내리는 시절은 봄과 여름이요,

그 중에도 그 혜택을 가장 아름답게 내는 것은 봄, 봄 가운데도 만산에 녹엽이 싹트는 이 때 일 것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먼 산을 바라보라. 어린애의 웃음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오월의 하늘, 나날이 푸르러 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 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어 녹음을 스쳐 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곧 모든 것을 가져올 듯하지 아니한가?

 

오늘도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맑고, 우리 연전 일대를 덮은 신록은 어제보다도 한층 더 깨끗하고 신선하고 생기 있는 듯하다. 나는 오늘도 나의 문법 시간이 끝나자, 큰 무거운 짐이나 벗어놓은 듯이 옷을 훨훨 떨며, 본관 서쪽 숲 사이에 있는 나의 자리를 찾아 올라간다.

나의 자리래야 솔밭 사이에 있는 겨우 걸터앉을 만한 조그마한 소나무 그루터기에 지나지 못하지마는, 오고 가는 여러 동료가 나의 자리라고 명명하여 주고, 또 나 자신도 하루 동안에 가장 기쁜 시간을 이 자리에서 가질 수 있으므로, 시간의 여유 있는 때마다 나는 한 특권이나 차지하듯이, 이 자리를 찾아 올라와 앉아 있기를 좋아한다.

 

물론 나에게 멀리 군속을 떠나 고고한 가운데 처하기를 원하는 선골이 있다거나, 또는 나의 성미가 남달리 괴팍하여 사람을 싫어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역시 사람 사이에 처하기를 즐거워하고, 사람을 그리워하는 갑남을녀의 하나요,

또 사람이란 모든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사람으로서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사람 사이에 살고, 사람 사이에서 울고 웃고 부대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때푸른 하늘과 찬란한 태양이 있고, 황홀한 신록이 모든 산, 모든 언덕을 덮은 이 때, 기쁨의 속삭임이 하늘과 땅, 나무와 나무, 풀잎과 풀잎 사이에 은밀히 수수되고, 그들의 기쁨의 노래가 금시라고 우렁차게 터져 나와, 산과 들을 흔들 듯한 이러한 때를 당하면, 나는 곁에 비록 친한 동무가 있고, 그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자연에 곁눈을 팔지 않을 수 없으며, 그의 기쁨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사람이란세속에 얽매여,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주머니의 돈을 세고, 지위를 생각하고, 명예를 생각하는 데 여념이 없거나, 또는 오욕 칠정에 사로잡혀,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는 데 마음에 영일을 가지지 못하는 우리사람이란, 어떻게 비소하고 어떻게 저속한 것인지.

 

결국은 이 대자연의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조화를 깨뜨리는 한 오점 또는 한 잡음밖에 되어 보이지 아니하여, 될 수 있으면 이러한 때를 타서, 잠깐 동안이나마 사람을 떠나 사람의 일을 잊고, 풀과 나무와 하늘과 바람과 한가지로 숨쉬고 느끼고 노래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또, 사실 이즈음의 신록에는 우리 마음에 참다운 기쁨과 위안을 주는 이상한 힘이 있는 듯하다. 신록을 대하고 있으면, 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머리를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모든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씻어 낸다.

 

그리고, 나의 마음의 모든 티끌나의 모든 욕망과 굴욕과 고통과 곤란이 하나하나 사라지는 다음 순간 , 별과 바람과 하늘과 풀이 그의 기쁨과 노래를 가지고 나의 빈 머리에, 가슴에, 마음에 고이고이 들어앉는다. 말하자면, 나는 흉중에도 신록이요, 나의 안전에도 신록이다.

 

주객 일체, 물심 일여라 할까, 현요하다 할까, 무념무상, 무장무애, 이러 한 때 나에게는 아무런 감각의 혼란도 없고, 심정의 고갈도 없고, 다만 무한한 풍부의 유열과 평화가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또, 이러한 때에 비로소 나는 모든 오욕과 모든 우울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고, 나의 마음의 모든 상극과 갈등을 극복하고 고양하여, 조화 있고 질서 있는 세계에까지 높인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러기에, 초록에 한하여 나에게는 청탁이 없다. 가장 연한 것에서 가장 짙은 것에 이르기가지 나는 모든 초록을 사랑한다. 그러나 초록에도 짧으나마 일생이 있다. 봄바람을 타고 새 움과 어린 잎이 돋아 나올 때를 신록의 유년이라 한다면, 삼복 염천 아래 울창한 잎으로 그늘을 짓는 때를 그의 장년 내지 노년이라 하겠다.

유년에는 유년의 아름다움이 있고, 장년에는 장년의 아름다움이 있어, 취사하고 선택할 여지가 없지마는, 신록에 있어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이 즈음과 같은 그의 청춘 시대움 가운데 숨어 있던 잎의 하나 하나가 모두 형태를 갖추어 완전한 잎이 되는 동시에, 처음 태양의 세례를 받아 천신하고 발랄한 담록을 띠는 시절이라 하겠다.

 

이 시대는 신록에 있어서 불행히 짧다. 어떤 나무에 있어서는 혹 2,3주일을 셀 수 있으나, 어떤 나무에 있어서는 불과 3,4일이 되지 못하여, 그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은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이 짧은 동안의 신록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참으로 비할 데가 없다. 초록이 비록 소박하고 겸허한 빛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때의 초록은 그의 아름다움에 있어 어떤 색채에도 뒤지지 아니할 것이다.

 

예컨대, 이러한 고귀한 순간의 단풍 또는 낙엽송을 보라. 그것이 드물다 하면, 이 즈음의 도토리, 버들, 또는 임산에 있는 이름 없는 이 풀 저 풀을 보라. 그의 청신한 자색, 그의 보드라운 감촉, 그리고 그의 그윽하고 아담한 향훈, 참으로 놀랄 만한 자연극치의 하나가 아니며, 또 우리가 충심으로 찬미하고 감사를 드릴 만한 자연의 아름다운 혜택의 하나가 아닌가?

 

<출처: 이양하, 신록예찬, 이양하 저 이양하 수필 전집, 현대문학,2001>

 

🍏해설

 

초점 해설

 

한국 명작 수필 중 하나다.

 

표면적으로는 자연의 혜택과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있으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세속적인 삶의 태도를 반성하도록 권유하고 있는 듯 하다.

 

불현듯이 고개를 들었을 때 우리들의 시야를 사로잡고 마는 아름다운 자연이 있다. 이 아름다움을 자신의 주변에 풍부하게 거느리는 것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삶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러나 작가는 수식을 최대한 절제하면서 사색을 자유롭게 펼쳐 나가고 있다.

 

이양하와 윤동주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현재의 연세대) 문과 재학시절 이양하는 윤동주의 주임교수(영문학과)였다.윤동주는 졸업 시 졸업기념 시집을 내려고 이양하 교수를 찾아갔다. 이 교수는 윤동주의 시가 모두 항일정신에 가득 차 있어 일제의 처벌이 예견된다면서 출판을 보류시켰다.

 

대신에 윤동주는 서시 등 자신의 시들을 필사본으로 3부 만들어 시인이 한 부, 이교수가 한 부,아끼는 후배인 고 정병욱(후에 서울대 국문과 교수)이 한 부 보관하였다.정병욱은 이 필사본을 일제 때 학병으로 징용당해 나가면서 어머니에게  보관을 부탁, 어머니는 고향집 마루를 뜯고 땅속에 묻어 잘 보관, 해방 후 정지용 시인의 도움으로 윤동주 시집을 1948년 처음으로 출간하였다. 정병욱과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윤동주는 세상에 알려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필사본 3부 중 윤동주는 일제 감옥에서 옥사하였고 이양하 교수 보관본은 분실해서 정병욱 보관본만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전남 광양 정병욱 생가에는 운동주 육필 원고가 보관되어 있는 조그마한 윤동주 문학관이 있다.

이양하 숲길 사진:연세대 공식 블로그

이양하와 윤동주가 걸었던 숲길

 

연세대 캠퍼스 내에 보존되어 있는 이양하 숲길이다. 연세대는 이 숲길에서 이양하 교수의 명수필 신록예찬이 탄생되었다고 말한다.

 

사실은 윤동주 시인도 문과 학생(기숙사:핀슨관 숙식)으로서 이 숲길을 매일 거닐면서 그의 유명한 명시들을 구상하고 탄생시켰다.연세대는 지금도 이 유명한 숲길을 잘 보존하고 있다. 연세대에게 찬사를 보낸다.

신록예찬에 나오는 나무 그루터기 사진: 연세대 공식 블로그

 

이양하 교수가 매일 앉았던 자리

 

신록예찬에서 이양하가 매일 앉아서 잠시 쉬어 간다는 나무 그루터기에 연세대는 청송대(聽松臺)라는 표석을 세워 놓았다.청송대! 소나무 숨소리를 듣는 곳이라는 뜻이다.

고 정병욱은 윤동주의 시 필사본을 필사적으로 보관,우리에게 알린 우리의 은인이다.

사진:네이버 블로그 '고종완의 여행을 떠나요'에서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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