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수필 거리의 악사를 감상해 보자.대작가의 자기 성찰을 만나게 된다.
거리의 악사
/ 박경리
작년과 금년, 여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마다 제일 인상에 남는 것은 거리의 악사(樂士)다. 전주에 갔을 때, 아코디언을 켜고 북을 치면서 약 광고를 하고 다니는 풍경에 마음이 끌렸고, 작년 가을 대구에 갔을 때, 잡화를 가득 실은 수레 위에 구식 축음기를 올려 놓고 묵은 유행가 판을 돌리며 길모퉁이로 지나가는 행상의 모습이 하도 시적이어서 작품에서 써먹은 일이 있지만, 역시 작년 여름, 진주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 때는 새로 착수한 작품을 위해 자료 수집과 초고를 만들기 위해 여행을 떠났었다. 일 없이 갔었으면 참 재미나고 마음 편한 혼자 여행일 테지만 일을 잔뜩 안고 와서, 그것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 하루하루 날만 잡아 먹는다고 초조히 생각하다가 답답하면 지갑 하나, 손수건 하나 들고 시장길을 헤매고 낯선 다방에 가서 차를 마시곤 했었다. 그래도 늘 일이 생각 속에 맴돌아 뭣에 쫓기는 듯 휴식이 되지 않는다.
어느 날 아침, 조반도 하기 전에 나는 밀짚모자를 들고 여관 밖으로 나왔다. 서울서 내려간 듯 낡은 합승, 혼자 빌리면 택시가 되는―주차장으로 가서 차 한 대를 빌려 가매못으로 가자고 했다. 운전사는 아침 안개도 걷히기 전에 밀짚모자 든 여자가 가매못으로 가자 하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는지 좀 떨떠름해 하다가 차를 내몰았다. 옛날 학교 시절에 몇 번 가 본 일이 있는 가매못 앞에서 두 시간 후에 나를 데리러 오라 알려 주고, 나는 천천히 가매못 옆에 있는 농가길을 따라 저만큼 보이는 언덕 위에 나란히 두 개 있는 무덤을 향해 걸어갔다. 어떻게 길을 잘못 들어 가파로운 벼랑을 기어 올라 무덤에 이르렀을 때, 아침 안개는 다 걷혀지고 가매못 너머 넓은 수전 지대와 남강 너머 댓숲이 바라보였다. 그리고 아침 햇볕이 뿌옇게, 마치 비눗물처럼 번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우두커니 혼자 앉아서 허겁지겁 달려 온 자기 자신의 변덕을 웃으며, 그러면서도 작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얼마 동안을 그러고 앉았다가 뒤통수를 치는 듯한 고독감에 나는 쫓기듯 산에서 내려오고 논둑길을 걸어오는데,
"장판 사려어―"
외치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바로 앞에 장판지를 말아서 짊어진 할머니가 다시 '장판 사려' 하고 외친다. 나는 그의 뒤로 바싹 붙어서 따라가다가,
"할머니?"
하고 불렀다. 할머니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을 했다.
"이러고 다니면 장판지가 더러 팔려요?"
"사는 사람이 있으니께, 팔리니께 댕기지."
"많이 남아요?"
"물밥 사 묵고 댕기믄 남는 것 없지, 친척집에서 잠은 자고……"
노파는 다시 외친다. 집이래야 눈에 띄는 농가가, 박덩굴 올라간 초가 지붕이 몇 채도 안 되는데, 뒤따라 가는 내 생각으론 한 장도 팔릴 것 같지가 않다. 그래도 노파는 유유히 목청을 돋우어 장판 사라고 외치다가, 그것도 그만두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연못 속의 금붕어가 어쨌다는 그런 노래였는데 너무 구슬프게 들려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다가, 여기도 또한 거리의 악사가 있구나 하고, 어쩌면 이런 사람들이 진짜로 예술가인지 모르겠다는 묘한 생각을 하다가, 그 노파는 윗마을로 가고 나는 가매못 곁에 와서 우두커니 낚시질을 하고 있는 아이들 옆에 서서 구경을 한다. 부평초가 가득히 깔려 있는 호수에 바람이 불어 그 부평초가 나부끼고 연꽃 비슷하기는 하나 아주 작고 노오란 빛깔의 꽃이 흔들린다.
"이게 무슨 꽃이죠?"
하고 물었더니 고기를 낚아 올리던 청년이,
"말꽃이라 하지요."
"말꽃……."
가련한 꽃이름이 말꽃, 어쩐지 잘못된 것 같아 꽃에 대하여 미안한 생각이 드는데,
"저저, 선생님."
하고 누가 뒤에서 부른다. 여기서 나를 부를 사람은 없다. 이십 년 세월이 지나 이제 이 고장은 낯설고 남의 땅만 같고, 그래서 일 생각만 잊는다면, 나는 외로움이 행복스럽게 될 수 있는 기분인데,
"저, 선생님."
나는 하는 수 없이 돌아보았다. 여학생이,
"저, 박 선생님 아니어요?"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다. 나를 알 사람이 있을 턱이 없다. 더욱이 이런 소녀는.
"그렇지만 어떻게 나를?"
"저 책에서 봤어요. 사진으로요."
나는 아차! 싶었다. 그리고 나를 알아 주어서 고마운 마음보다 나를 의식하게 하는 번거로움에 짜증스런 마음이 앞섰다. 얼마나 좋은 시간인가. 그 시간을 그 소녀는 찢어 버린 것이다. 나는 이 곳 여학교에 다니느냐고 소녀에게 물었다. 그리고 나도 이 곳 여학교를 옛날에 다녔노라고 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중학을 나와서 고등 간호 학교에 다녀요."
하며 소녀는 수줍어서 말했다. 나는 다시 이 마을에 사느냐고 물었다. 소녀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호수에 사람이 빠져 죽니?"
"네, 가끔. 작년에 할머니가 한 분 자살을 했어요."
"그럼 저 둑에서 떨어져 죽겠구나."
"글쎄요……."
"여기서 물에 빠지려면 한참 걸어 들어가야잖니? 걸어 들어가는 동안 마음이 변할 텐데…… 그래도 죽는 사람이면 상당히 의지가 강할 거야."
나는 쓸데없는 소리를 하며 으시시 떨었다.
마침 부탁해 놓은 차가 왔기에 소녀와 작별하고 자동차에 올랐다. 가매못 옆을 지나가면서 나는 어릴 때 상두가를 구슬피 불러서 길켠에 선 사람들을 울리던 그 넉살 좋은 사나이와 농악꾼에 유달리도 꽹과리를 잘 치고 춤 잘 추던 사람을 생각하며, 그들이야말로 예술가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거리의 악사―멀리 맑은 공기를 흔들며 노파가 부르던 노래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
<출처: 박경리, 거리의 악사, 박경리 저 Q씨에게,솔,1993>
🍎해설
전업 작가인 박경리는 여행 도중 생활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예술행위를 하는 거리의 악사들을 만난다. 생활 자체가 예술행위인 거리의 악사가 참된 예술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장판 장사 할머니 그리고 간호학교 학생과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이런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뭔가 써야 하겠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인위적으로 예술품을 생산해 내는 전업 예술가인 자신에 대해서 자책을 한다.
역시 대작가이다. 작가의 부단한 자기 성찰이 느껴진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삶의 자세를 한 번 되돌아 보게 만드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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