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수필

서정주 명수필 선운사

무명시인M 2021. 1. 17.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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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의 아침 사진: 고창군청

 

오늘은 서정주 시인의 명수필 선운사를 감상해 보자.불후의 명시 선운사 동구의 탄생 배경이 나온다.

선운사

/서정주

 

선운사 주지화상 배성원 씨의 말씀을 들으면, 선운사에 있는 만세루라는 집을 처음 와 본 어떤 권위있는 늙은 일본 사람 건축 전문가 하나는 이 집을 향해 절을 수없이 되풀이하더라 한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여전히 그 집을 향해 고맙기도 하시지

고맙기도 하시지.” 웅얼거리면서 대답하기를,

보시오. 이집이 보통 집인가를. 이집은 이를테면 무명 헝겊을 조각조각 주워 모아 꿰매어서, 어떤 온전한 비단 옷보다 더 곱고 훌륭한 옷을 짓듯이 지은 집이오. 모두 세 토막, 네 토막씩 못도 나무못을 쳐 이어 맞춰서 기둥들도 세우고 들보도 했지만, 자세히 좀 보시오. 그 토막토막 이어맞춘 들보의 틈틈이 또 천장 그득히 한 획의 허튼 수작도 없이 성실하게도 아름다이 새겨놓은 저 목조의 조각들을. 저렇게도 아름다운 예술을 하던 이들이 만든 집인 걸 생각하고 보자니, 저절로 발걸음이 거듭 멈춰지고 또 절이 저절로 나옵니다.” 하더라는 것이다.

 

짧은 나무토막을 이어서 누더기집을 지어 그걸로 정교하고도 아치있는 예술품을 이룬 예는 한국의 이 만세루와 같은 것 아니고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 절 법당에 모셔놓은 향나무로 새긴 등신대(等身大)의 세 분의 부처님과 보살상도 이곳 아니고서는 더 볼 수 없는 것이다. 순금으로 꽤 두껍게 입힌 도금술도 완전하여서 처음 만든 그대로 한 점의 상처도 아직 보이지 않은 채로, 그 눈과 눈썹들의 선연한 각성은 우리 영원 가운데서 제일 맑게 새어오는 아침을 우리 보는 이의 눈에 늘 불러일으키어 여간 반갑지 않다.

 

이 세 분의 몸은 또 향나무 중에서도 좋은 향나무로 되어 있어 공기가 축축한 날에는 은은히 향기를 온 법당 안에 풍기고 밀려나와 절 뜰까지 적시곤 한다니, 세상의 부귀영화, 또 세상의 많은 고민 다 귀찮고 좀 더 급수가 높은 냄새가 소원인 사람은 꼭 궂은 날을 가려 가서 한번 맡아보는 게 좋을 것이다.

 

이 세 부처님과 보살님의 눈의 새벽을 느끼는 이들에게 나는 서른세 개 불교의 하늘 중의 맨 위 하늘을 상징하는 이 산골의 제일 높은 데 있는 암자, 도솔천 내원궁으로 올라가 보기를 권한다. 도솔암에서 남쪽으로 기어올라가는 절벽의 비탈길에 쌓아올린, 벌써 천몇백 년은 좋이 지냈을 아흔몇 갠가의 폭이 좁은 돌층계를 현기증이 들지 않도록 조심해 가려 디디고 올라가면 거기 미륵보살의 처소인 내원궁이 있는데, 이 미륵보살은 또 우리나라 태생이 아니라 인도에서 옛날 만든 것의 하나다.

 

검당선사라는 중이 이 선운사를 세울 무렵, 우리 황해바다의 이 언저리 해변에 자주 출몰하던 외국 해적들한테서 얻은 것으로, 우리 좋은 불상들에 비긴다면 많이 미련스레 뵈고, 갖은 어둠이 많아 답답한 느낌이긴 하나, 그래도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외국풍의 한 맛은 지닌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내원궁에 가 보기를 권하는 것은 물론 이 상대(上代) 인도제의 미련스러워 뵈는 보살의 모양 때문이 아니다.

 

우리의 하늘에다가 불교는 서른세 개의 하늘의 계급을 두고, 사람 가운데 정신이 맑게 갠 사람은 그 맨 위의 하늘 도솔천에 사는 것으로 생각해 오고 있거니와, 이 선운사의 도솔천의 내원궁은 그 놓여진 상징적 실감이 내가 본 어느 암자에서보다도 희한했기 때문인 것이다.

 

내 피와 살이 아직 마음에 다 붙어 있는 연유로 다시 무거워져, 선운사 큰 절로 내려오니, 주지스님이 도솔암 동백꽃은 벌써 피었지요?” 한다. “피었습니다. 여기보단 훨씬 높은 곳이라도 거기는 추위가 적고 햇빛이 잘 쬐게 자리를 잡아서 그렇죠?”

 

내가 이렇게만 대답하고 만 것은 그 이상의 딴 것들 이때 나는 동백꽃을 두고 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선운사를 하직하고 5리를 다시 걸어 내려 버스가 다니는 한길가에 왔을 때, 나는 그 엉터리 대답을 불가불 마음속으로 지워버리고, 다음과 같이 역시 고쳐야만 하였다.

 

“아! 거기는 좋은 귀신이 많이 깨어 살고 있어라우.”

왜냐하면 이날(1964년 3월 7일) 오후 한 시쯤, 내가 서 있던 여기는, 내가 이로부터 22년인가 23년 전의 스물여섯 살인가 일곱 살 때, 이슬비 오는 어떤 가을 오후 지나가다가, 한 채의 주막집을 발견하고 들어가 한나절 술을 마시던 곳임이 분명한데, 이날 여기를 찾아보니 그날의 그 집은 날아간 듯 어디로 없어지고 그 자리엔 실파만 자욱이 나있고, 누가 “그 집 주모는 벌써 죽었어라우.” 한 마디 한 때문이었다.

 

사실은 이 자리엔 스물몇 해 전의 그땐, 육자배기를 내게 잘 불러 준 훤칠하게 생긴 40대의 한 주모가 있었기에, 나는 이번 이 고을 학생들의 토주 잔치에 불리어 올 때 은근히 그와 다시 만날 것을 기대했던 것인데, 같이 가던 고려대 학생 조군이 나를 대신해 나서서 물으니,

“여자가 사나와서 6·25 사변 때 빨치산들한테 찔려 죽고, 집도 탔어라우.” 한 마디 한 때문이다.

 

그래, 나는 이 매운 실파만 남은 빈터 위에 육체 없이 있는 것이 이 근처의 어느 육체 가지고 있는 것보다도 대견했기 때문에, 그것을 예부터 내려오는 말로 ‘귀신’이라 하고, 마음속으로 ‘아!’ 소리를 쳤고, 또 높디높은 도솔암에서 지대가 낮은 큰 절보다도 그 핏빛 동백꽃을 훨씬 더 일찍 피게 하고 있는 것도 그 좋은 귀신의 힘들임을 겨우 다시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출처: 서정주,선운사,좋은 수필 2013년 8월호 다시 읽는 좋은 수필, 월간 좋은 수필,2013>

 

해설

 

미당 서정주 시인은 생전에 노벨문학상을 다섯차례나 추천받았다.

 

서정주 시인은 어린 시절 생가에서 가까운 고창 선운사에서 자랐다. 동백꽃이 완연한 대웅보전 앞 뜰에서,만세루에서 뛰어놀며 계절마다 그 멋을 달리하는 산사에서 풍부한 감성을 키웠다.

 

사실은 선운사가 동백을 조경한 이유는 화재 예방 때문이었다. 불에 강한 동백나무를 심어 산불로부터 법당을 보호하고자 함이었다. 이는 서정주 시인을 만나 시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선운사 동백꽃은 서정주 시인으로 유명해졌다.

 

여기에 소개하는 서정주 시인의 명수필 선운사의 고딕 부분을 보면 시인의 불후의 명시 선운사 동구의 탄생 배경을 엿볼 수 있다.

 

선운사 동구

/서정주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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