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균 명시 설야. 눈내리는 소리. 먼곳에 여인의 옷벗는 소리.
설야(雪夜)
/김광균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여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디 찬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
* 여위어 가다: 빛이 점점 어렴풋해지다.
추회(追悔) : 지나간 일이나 사람을 생각하여 그리워 하는 것.
❄출처 : 조선일보 1938년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 해설
눈내리는 소리.
“먼 곳에 여인의 옷벗는 소리”
이 한 구절 때문에 김광균의 설야는 오늘날까지도 인기다.
눈내리는 소리, 또한 먼 곳 여인의 옷벗는 소리가 실제로는 어찌 귀에 들리겠는가. 그러나 시인은 하늘거리며 내리는 눈과 여인의 옷벗는 모습을 소리에 연결시키며 여인의 수줍은 순결함과 함께 그리움을 환기시키고 있다. 이 매치는 전혀 저속하거나 외설스럽거나 욕정을 자극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을 느낄뿐이다.
하얗게 나리는 눈으로 인해 옛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촉발된 시인은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호롱불처럼 조용히 가슴을 불태우며 호올로 서 있다.
추억 속의 여인은 ‘호올로 차디 찬 의상’을 입고 있다. 이루지 못할 사랑이다. 재회의 가능성은 없다. 그러니 슬플 수밖에 없고, 시인은 그 슬픔을 눈 위에 고이 서리는, 즉 묻어두는 것이다.
시인의 그리움과 사랑의 형상화가 슬프면서도 아름답기 그지 없다. 명시다.
🌹 김광균 시인
김광균(金光均, 1914 ~ 1993년) 시인은 우리 문학사에 모더니즘 시인으로 남는 분이다.
그는 “시는 하나의 회화이다”라는 시론을 전개하면서 시각적인 시를 계속 발표하여 시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고, 후진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김광균은 정지용·김기림 등과 함께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을 선도한 시인으로 도시적 감수성을 세련된 감각으로 노래한 기교파를 대표하였다. 명시가 많다. 시집에 《와사등》, 《기항지》, 《황혼가》 등이 있다.
광복 후 한국 전쟁 중 납북된 동생이 운영하던 건설상회를 대신 운영하며 중견 기업으로 키워내는 등 후대엔 시인의 길이 아닌, 기업가로 활동했다.
시 작업을 중단하였다가 시단에 복귀, “나는 죽어 기업인이 아니라 시인으로 불리길 더 원한다”고 밝혔었다.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끝에 호롱불 여위워 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내려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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