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 좋은 시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시인의 명시 중 하나다.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출처 : 문정희, 한계령을 위한 연가, 시집 남자를 위하여, 민음사, 1996.
🍎 해설
아름다운 서정시다. 쉽고 리듬이 좋다. 사그락 사그락 싸리눈이 내리다가 펑펑 함박눈이 내린다. 깊은 산골에 산골물이 흘러가듯 아름답게 흘러간다.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 폭설에 갇히고 싶다고 화두를 꺼낸다. 구원의 손길도 마다하고 기꺼이 고립되길 원한다. 사랑은 모든 길을 차단하고 나누는 둘만의 고립이다.
어떻게 보면, 운명이라는 한계령의 한계에 도전하는 눈부신 자유 추구다. 옷자락도 보이지 않고 숨어있는 사랑의 고립은 축복이다.
이건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누구나 갖는 꿈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느덧 이 시 안에 갇혀 고립되고 만다. 짧지만 축복의 순간이다.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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