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김혜순 별을 굽다

무명시인M 2023. 12. 10. 08:30
728x90
반응형
김혜순 별을 굽다.

김혜순 별을 굽다. 우리가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별을 굽다

/김혜순

사당역 4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려고
에스컬레이터에 실려 올라가서
뒤돌아보다 마주친 저 수많은 얼굴들
모두 붉은 흙 가면 같다
얼마나 많은 불가마들이 저 얼굴들을 구워냈을까

무표정한 저 얼굴 속 어디에
아침마다 번쩍 뜨게 하는 힘 숨어 있었을까
밖에서는 기척도 들리지 않을 이 깊은 땅속을
밀물져 가게 하는 힘 숨어 있었을까
 
하늘 한구석 별자리마다 쪼그리고 앉아
별들을 가마에서 구워내는 분 계시겠지만
그분이 점지하는 운명의 별빛 지상에 내리겠지만
물이 쏟아진 듯 몰려가는
땅속은 너무나 깊어
그 별빛 여기까지 닿기나 할는지
 
수많은 저 사람들 몸속마다에는
밖에선 볼 수 없는 뜨거움이 일렁거리나 보다
저마다 진흙으로 돌아가려는 몸을 일으켜 세우는
불가마 하나씩 깃들어 있나 보다
 
저렇듯 십 년 이십 년 오십 년 얼굴을 구워내고 있었으니
모든 얼굴은 뜨거운 속이 굽는 붉은 흙 가면인가 보다 🍒
 
❄출처 : 김혜순 시집, 『당신의 첫』, 문학과지성사, 2008,
 

🍎 해설

우리는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수없이 많은 모르는 얼굴들을 만난다. 이 시는 출근길의 지하철에서 마주친 얼굴들을 소재로 삼아 인간의 생명력이 인간의 내부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이 시는 2연에서 그 무표정한 얼굴들 어디에 일상을 영위하게 하는 활력이 존재하는가라고 힘의 근원에 대해 묻고 있다.
 
그것은 신의 섭리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3연에서 시인은 신의 ‘별빛’은 이곳 땅속에는 도달하지 않는 듯하다고 말한다.
 
이런 질문과 응답의 과정을 통해 4연에서 시인은 모든 사람들의 몸속에는 바깥에서는 볼 수 없는 ‘뜨거움’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결국 5연에서 시인은 모든 사람들의 얼굴은 “뜨거운 심장”이 구워내는 일종의 ‘흙 가면’이라는 결론을 내세운다.
 
한 마디로, 현대인의 삶의 에너지는 인간 바깥의 초월적 세계가 아니라 인간 내부의 ‘뜨거운 심장’에서 기원한다는 생각이다. 뜨거운 속이 굽는 “모두 붉은 흙 가면 같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만나는 모르는 사람들은 아침이면 벌떡 일어서서 간밤에 뜨거운 자신의 몸 속 불가마에서 구워낸 제 얼굴을 쓰고 거리로 뛰쳐나오는 것이다.
 

🌹 김혜순 시인

김혜순은 1955년 경북 울진에서 출생했다. 1978년 《동아일보》신춘문예 평론 부분에 「시와 회화의 미학적 교류」가 당선되어 등단했고, 1979년 계간 《문학과지성》 가을호에 「담배를 피우는 시인」 등을 발표하면서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또 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 『우리들의 陰畵』 『나의 우파니샤드,서울』 『불쌍한 사랑 기계』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한 잔의 붉은 거울』 『당신의 첫 』 『슬픔치약 거울크림』 『피어라 돼지』 『죽음의 자서전』, 시론집으로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산문집으로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현대시작품상, 소월시문학상, 미당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를 역임했다.
 
김혜순의 시 세계는 일반적으로 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인 남성 질서에 대항하는 여성주의 텍스트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시가 쉽지는 않다.
 
2023년, 영문으로 번역돼 미국에서 출판된 김혜순 시인의 작품이 뉴욕타임스(NYT) '올해 최고의 시집 5권' 중 하나로 선정됐다. 김 작가의 '날개 환상통(Phantom Pain Wings)을 포함했다.
 
NYT는 이 시집에 대해 "영적이고, 기괴하고, 미래가 없는 상황 등 다양한 종류의 공포가 느껴진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 시집이 거시적인 측면과 미시적인 측면에서 미학적인 힘을 전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앞서 김 시인은 지난 2019년 영문판으로 나온 '죽음의 자서전'으로 번역 시집에 수여되는 영미권 최고의 상으로 꼽히는 캐나다 그리핀시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반응형

사당역 4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려고
에스컬레이터에 실려 올라가서
뒤돌아보다 마주친 저 수많은 얼굴들
모두 붉은 흙 가면 같다
얼마나 많은 불가마들이 저 얼굴들을 구워냈을까

무표정한 저 얼굴 속 어디에
아침마다 번쩍 뜨게 하는 힘 숨어 있었을까
밖에서는 기척도 들리지 않을 이 깊은 땅속을
밀물져 가게 하는 힘 숨어 있었을까
 
하늘 한구석 별자리마다 쪼그리고 앉아
별들을 가마에서 구워내는 분 계시겠지만
땅속은 너무나 깊어
그 별빛 여기까지 닿기나 할는지
 
수많은 저 사람들 몸속마다에는
밖에선 볼 수 없는 뜨거움이 일렁거리나 보다
저마다 진흙으로 돌아가려는 몸을 일으켜 세우는
불가마 하나씩 깃들어 있나 보다
 
저렇듯 십 년 이십 년 오십 년 얼굴을 구워내고 있었으니
모든 얼굴은 뜨거운 속이 굽는 붉은 흙 가면인가 보다

지하철 뒤돌아보다 마주친 수 많은 얼굴들 모두 붉은 흙 가면 같다

 

땅속은 너무 깊어 그 별빛 여기까지 닿기나 할는지
불가마 하나씩 깃들어 있나 보다
모든 얼굴은 뜨거운 속이 굽는 붉은 흙 가면인가 보다
반응형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병화 호수  (2) 2023.12.19
나태주 첫눈  (0) 2023.12.16
정용철 행복한 12월  (2) 2023.12.06
도종환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0) 2023.12.05
김경미 12월의 시  (0) 2023.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