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끝별 좋은 시 세상의 등뼈. 세상을 곧추 세우는 것은 무작정 대 주는 것이다.
세상의 등뼈
/정끝별
누군가 내게 품을 대 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 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 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깨를 대주고
대 준다는, 그것은
무작정 내 전부를 들이밀며
무주공산으로 떨고 있는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져
더 높은 곳으로 너를 올려 준다는 것
혈혈단신 땅에 묻힌 너의 뿌리 끝을 일깨우며
배를 대고 내려앉아 너를 기다려 준다는 것
논에 물을 대 주듯
상처에 눈물을 대 주듯
끝 모를 바닥에 밑을 대 주듯
한 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에 거룩한 밥이 되어준다는,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
❄출처 : 정끝별 시집, 『와락』, 창비, 2008.
🍎 해설
정끝별 시인은 분방한 시적 상상력으로 사랑과 가족과 사람과 우주를 노래해 왔다. 시인의 목소리는 경쾌하고 발랄하며, 늘 연민과 온기를 품고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대 주는 것이 우리의 삶을 등뼈처럼 곧추 세우고 지탱한다”고 노래한다.
대 주는 것이란 무엇인가? 품을 대 주고, 돈을 대 주고, 입술을 대 주고, 어깨를 대 주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무작정 대 주는 것이 세상의 등뼈라고 말한다.
'품'과 '돈'과 '입술'과 '어깨'를 대주는 누군가의 사랑의 정신 없이는 이 세상은 존속할 수가 없다. 나 자신도 누군가의 사랑의 정신 덕분에 존재한다. 그러한 나는 '나의 전부'로 '무작정' 너의 떨고 있는 '가지 끝'과 '혈혈단신 묻혀 있는 뿌리 끝', 즉 너의 전부를 일깨우며 가장 낮은 자리에서 기다려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사랑하는 일이다.
‘밥’이란 얼마나 소중한 생명의 단어인가? '사랑한다'는, 너무나 흔해진 말 대신에 논에 물을 대 주듯 한 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에 거룩한 밥이 되어준다는 것이 사랑이라고 시인은 노래한다.
사랑은 이처럼 긍휼의 정신이고 또한 사랑은 이처럼 말 없는 성격이라는 걸 느끼게 해 주는 시다.
누군가 내게 품을 대 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 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 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깨를 대주고
대 준다는, 그것은
무작정 내 전부를 들이밀며
논에 물을 대 주듯
상처에 눈물을 대 주듯
한 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에 거룩한 밥이 되어준다는,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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