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김경미 좋은 시 비망록

무명시인M 2022. 6. 2.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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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좋은 시 비망록. Source: www. pixabay. 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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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좋은 시 비망록. 스물네 살이다.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비망록

/김경미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네 살이었다. 신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 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 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

 

출처 :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시, 김경미 시집,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실천문학사, 1989.

 

🍎 해설

이 시는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이다. 이 시는 유명한 시가 되었다. 많은 20대들이 이 시에서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고 말한다.

 

이 시에는 스물네 살에서 스물다섯 살로 넘어가는 나이의 여성이 등장한다. 신은 그녀의 절망을 구원하지 않았고, 그녀가 만나는 이들은 팔뚝으로 눈물을 훔쳤으며, '산두목 같은 사내'는 끝내 그녀의 사랑이 되지 못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

 

그러나 주인공인 스물네살의 여성은 젊은 열정을 용광로처럼 쏟아낸다.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그러다가 그 젊은 이는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편지를 쓰듯이 감정을 톤 다운시킨다. 그리고는 실낱처럼 아무 것에도 무게지우지 않는 바람처럼 살고 싶다는 고백을 누군가에게 하고 싶게 만든다.

아름다운 비망록이다.

 

🌹 김경미 시인

김경미(金慶美, 1959년 서울 출생)시인은 한양대학교 사학과와 고려대학교대학원 국문학과를 석사 수료하였다. 1983중앙일보신춘문예에 비망록으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나의 세컨드는, 고통을 달래는 순서, 밤의 입국심사가 있다. 에세이집으로 바다, 내게로 오다, 행복한 심리학, 일상생활의 심리학, 그 한마디에 물들다, 너무 마음 바깥에 있었습니다가 있다. 현재 KBS 1FM 방송작가로 활동 중이다.

 

노작문학상, 서정시학작품상을 수상하였으며, 시집 밤의 입국 심사가 시 전문지 시작이 선정한 2015년 올해의 최고 시집으로 뽑힌 바 있다.

 

방송작가로서는 별이 빛나는 밤에를 시작으로 김미숙의 음악 살롱, 전기현의 음악 풍경, 노래의 날개 위에 등의 라디오 프로그램 원고를 썼으며, 2007년 한국방송작가협회 라디오작가상을 수상했다.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Source: www. pixabay. 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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