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짧은 시 저녁 무렵. 저녁 무렵은 누구에게나 경건한 순간이다.
저녁 무렵
/고은
절하고 싶다
저녁 연기
자욱한 먼 마을 🍒
❄출처 : 고은, 저녁 무렵, 시인의 마음으로 시 읽기, 사문난적, 2011.
🍎 고은 시인의 자작시 해설
1940년대 후반 중학생이 된 나는 4㎞ 거리의 학교와 집 사이 황톳길을 걸어 다녔다. 비오는 날은 우산 대신 도롱이를 걸쳤다.
한국전쟁 이전까지 약 4년 동안 이런 길을 오고 갔으므로 길 가녘 우거진 여름날의 각시풀과 꿀먹은 벙어리 같은 돌멩이도 한 핏줄인 양 정이 사뭇 들었다.
방과 후 거의 혼자 돌아오는 시간이 누구에게도 발설하기 싫은 행복이었다. 호젓할 때면 나는 내 동무가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혼자서 복수(復數)였다.
길은 어쩌다 만나는 장꾼이나 소달구지 말고는 비어 있었다. 미술반은 자주 늦게 끝났으므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저녁 무렵이기 십상이었다.
혼자 길을 걷는 동안 나는 학교와 집의 의무로부터 지극히 자유로웠다. 그런 시간으로 너무 일찍부터 낮 동안의 끝인 저녁에 익숙해졌다.
지나는 길의 마을마다 밥 짓는 저녁 냉갈이 저기압의 땅 위를 가득히 깔려 있을 때의 그 형언할 수 없는 경건한 향수는 한 소년에게 감수성의 근원이 되어 주었다.
새벽의 수탉 우는 소리, 아침 거미줄에 매달린 이슬 보석들과 동정(童貞) 같은 햇빛 소나기, 그리고 대낮의 갑작스러운 적막…들도 찬란한 환경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나의 저녁 무렵만 하겠는가.
하루 내내 들에서 일한 다음 해가 진 뒤의 연장을 물에 씻어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농부의 일과에 어느덧 나도 속해 있었다. 저녁은 그렇게 숭고하고 슬펐다.
‘돌아오다’, ‘돌아가다’라는 말이 나에게 달라붙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한자 ‘귀(歸)’자가 어쩌다 친정 나들이하는 여자의 기쁨을 담고 있다면 인간의 본성 안에 그런 귀향의 심상이 바닥져 있는 것 아닌가.
나중에 내가 쓴 시 중에 유난히 저녁이 많이 나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시인들에게도 저녁은 하나의 주조(主調)였다.
- 고은,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언론기고문(2002년)에서 발췌.
절하고 싶다
저녁 연기
자욱한 먼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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