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끝별 좋은 시 가지가 담을 넘을 때. 누구나 담이라는 시련을 넘어 도전해야 살아 남는다.
가지가 담을 넘을 때
/정끝별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의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가 믿어 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 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의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
* 도반 : 함께 도를 닦는 벗.
❄출처 : 정끝별, 가지가 담을 넘을 때(2005), 삼천갑자 복사빛, 민음사, 2005.
🍎 해설
누구의 삶에나 시련과 도전이 있다. 담으로 상징되는 시련이 있고 담장 너머 새로운 세상이라는 희망을 향해 우리는 도전한다.
가지가 담장을 너머 미지의 세계를 맞이하는 순간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도전의 벅찬 감동이 공존한다. 다만 수양버들 가지가 담을 넘어서는 데에는 뿌리와 꽃과잎의 혼연일체의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결국 혼연일체의 사랑과 믿음만이 시련을 극복하게 해주는 힘이다.
담장 너머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힘차게 도전하라. 당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있다.
🌹 안도현 시인의 해설
친구에게 상처 받았을 때, 애인에게 배신당했을 때, 세상에 절망했을 때, 가만히 이 시를 읽어도 좋겠군요. 좀 거창하게 말하면, 이 시는 불교에서 말하는 화엄의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너’ 없는 ‘나’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너’가 아니라 결국은 온전한 ‘나’라는 것입니다. ‘나’를 가두는 담도 감옥도 ‘나’라는 것입니다. 시의 마지막 석 줄을 읽고 나니 설렘으로 마음이 출렁입니다. 담을 넘어야 비로소 이름을 얻는다고 하니까요. 그게 도박이라 해도 알고 보면 도반이라 합니다. 느낌표를 하나 꽝, 찍어두고 싶습니다.
- 2008. 4. 14. 문학집배원 안도현.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의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애먼 뿌리와 꽃과 잎이
혼연일체가 믿어 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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