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서시. 운동주의 서시와 함께 읽으면 좋은 시.
서시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
❄출처 : 한강 시집, 『서랍을 저녁에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 해설
국가적 쾌거이고 역사적 쾌거인 한국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 수상자 한강 韓江 작가. 그의 詩를 평한다는 게 조금은 조심스럽긴 하다.
윤동주는 서시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라고 노래하였다.
한강 작가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와 같은 제목의 이 시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조용히 걸어가겠다는 다짐으로서의 서시”를 다른 차원에서 노래한다.
한강 작가는 운명을 과감하게 의인화한다.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떨어져 있었지만 늘 함께였던 나와 내 운명, 그 애증의 세월을 이제는 다 뛰어넘어서는, 그저 운명의 얼굴을, 그 얼굴에 새겨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보겠다는 것.
내 삶이 어떤 고통과 슬픔으로 얼룩졌더라도 혹은 얼룩지더라도 내 운명을 원망하지 않겠다는 그런 마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조용히 걸어가겠다는 다짐으로서의 서시.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서시는 비록 노벨문학상은 받지 못했지만 노벨문학상 수상자 이상으로 국민의 가슴 속에 지금도 살아 숨쉬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와 함께 우리가 사는 법을 조용히 얘기해 주고 있다.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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