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옛날의 그 집. 토지 박경리 작가가 남긴 마지막 시.
옛날의 그 집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출처 : <현대문학> 2008년 4월 발표, 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마로니에북스, 2008.
🍎 해설
대하소설 <토지>로 잘 알려진 박경리 작가는 원래 시로 출발했다. 작가는 “내가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남몰래 시를 썼기 때문인지 모른다.”라고 말했다.
이 시는 작가가 타계하던 해에 쓴 시이다. 작가는 자신이 사는 집을 묘사하면서 어쩌면 죽음을 앞두고 삶을 정리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궁형을 당해도 '사기'를 완성시킨 사마천에 위로 받으며 '토지'를 옛날의 그 집에서 완성시켰다.
그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라고 회고한다. 죽으면 가지고 갈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주변 모든 것이 버릴 것이요, 버릴 것만 남았다 생각하니 홀가분했다. 마지막 말,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말 없는 달관의 경지를 보여 준 시다.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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