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박경리 옛날의 그 집

무명시인M 2024. 2. 27. 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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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옛날의 그 집.

박경리 옛날의 그 집. 토지 박경리 작가가 남긴 마지막 시.

옛날의 그 집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출처 : <현대문학> 20084월 발표, 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마로니에북스, 2008.

 

🍎 해설

대하소설 <토지>로 잘 알려진 박경리 작가는 원래 시로 출발했다. 작가는 내가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남몰래 시를 썼기 때문인지 모른다.”라고 말했다.

 

이 시는 작가가 타계하던 해에 쓴 시이다. 작가는 자신이 사는 집을 묘사하면서 어쩌면 죽음을 앞두고 삶을 정리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궁형을 당해도 '사기'를 완성시킨 사마천에 위로 받으며 '토지'를 옛날의 그 집에서 완성시켰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라고 회고한다. 죽으면 가지고 갈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주변 모든 것이 버릴 것이요, 버릴 것만 남았다 생각하니 홀가분했다. 마지막 말,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말 없는 달관의 경지를 보여 준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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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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