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이기철 이향

무명시인M 2024. 2. 2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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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이향.

이기철 이향. 인간의 원천적 그리움인 향수.

이향(離鄕)

/이기철

제대를 하고 대학을 졸업하면

나는 개나리꽃이 한 닷새 마을의 봄을 앞당기는

산란초 뿌리 풀리는 조그만 시골에서

시나 쓰는 가난한 서생이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고급 장교가 되어 있는 국민학교 동창과

개인회사 중역이 되어 있는 어릴 적 친구들이 모두 마을을 떠날 때

나는 혼자 다시 이 마을로 돌아와 탱자나무 울타리를 손질하는

초부가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눈 속에서 지난해 지워진 쓴냉이 잎새가 새로 돋고

물레방앗간 뒷쪽에 비비새가 와서 울면

간호원을 하러 독일로 떠난 여자 친구의 항공엽서나 기다리며

느린 하학종을 울리는 낙엽송 교정에서

잠처럼 조용한 풍금소리를 듣는 2급 정교사가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시간은 물처럼 흘러갔고

놀 속에 묻히는 봄보리들의 침묵이 나를 무섭게 위협했을 때

관습의 신발 속에 맨발을 꽂으며 나는

눈에 익은 수많은 돌멩이들의 정분을 거역하기 시작했다.

염소를 불러 모우는 비음의 말들과

부피가 작은 몇 권의 국정교과서를 거역했다.

뒷산에 홀로 누운 조부의 산소를 한번만 바라보았고

그리고는 뛰는 버스에 올라 도시 속의 먼지가 되었다.

 

봄이 오면 아직도 그 골의 물소리와 아이들의 자치기 소리가

도시의 옆구리에 잠든 나의 꿈 속에

배달되지 않는 엽신으로 녹아 문지방을 울리며 흐르고 있다. 🍒


출처 : 이기철 시집, 우리집으로 건너온 장미꽃처럼, 문학사상, 2021.

 

🍎 해설

한국은 60년대를 거쳐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비로소 공업화, 산업화 과정을 겪었다. 이 때 발생한 것이 이농현상이다.

시인은 이러한 이농현상을 사회과학적 비평의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근원적으로 내재해 있는 원천적 그리움인 향수의 눈으로 봤다.

 

한때 시인은 시나 쓰는 가난한 서생을 꿈꾸었다. 친구들이 도시로 떠날 때 탱자나무 울타리를 손질하는 초부가 되고 싶었고 간호원을 하러 독일로 떠난 여자 친구의 항공엽서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역시 뛰는 버스에 올라 도시 속의 먼지가 되었다고 이농을 고백한다.

 

도시 속의 먼지가 되었다, 도시의 옆구리에서 잠을 잔다는 시적 메타포어가 인간의 원천적 그리움인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조용히 증폭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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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를 하고 대학을 졸업하면

나는 개나리꽃이 한 닷새 마을의 봄을 앞당기는

산란초 뿌리 풀리는 조그만 시골에서

시나 쓰는 가난한 서생이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나는 혼자 다시 이 마을로 돌아와 탱자나무 울타리를 손질하는

초부가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시간은 물처럼 흘러갔고

뒷산에 홀로 누운 조부의 산소를 한번만 바라보았고

그리고는 뛰는 버스에 올라 도시 속의 먼지가 되었다.

 

봄이 오면 아직도 그 골의 물소리와 아이들의 자치기 소리가

도시의 옆구리에 잠든 나의 꿈 속에

배달되지 않는 엽신으로 녹아 문지방을 울리며 흐르고 있다.

탱자나무 울타리를 손질하는 초부가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간호원을 하러 독일로 떠난 여자 친구의 항공엽서나 기다리며
그리고는 뛰는 버스에 올라 도시 속의 먼지가 되었다.
아이들의 자치기 소리가 도시의 옆구리에 잠든 나의 꿈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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